[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갈비 연대기(2) 소갈비 돌풍 일으킨 수원·포천名家…대구는 진갈비·동인동 찜갈비로 진화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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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1-11 08:11  |  수정 2022-11-11 08:22  |  발행일 2022-11-11 제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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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계산동 '땅집' 불고기 돌풍을 이용, 대구에서 '진갈비'를 통해 소갈비시대를 보여주었던 주인 진홍렬씨. 진씨 덕분에 이 골목은 갈비골목으로 롱런했지만 지금은 재개발 중이고 공사가 끝나면 진갈비와 성주숯불갈비 등이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모양이다.


1939년경 서울 낙원동 평양냉면집 주인이 전남(지금의 광주시) 송정리에 갔다가 그곳의 술집에서 가리를 대로 구워 파는 것을 보고 서울에 올라와 손님들에게 냉면과 함께 가리를 구워 팔기 시작했다. 당시는 냉면 한 그릇에 20전, 특제가 30전, 갈비 한대가 20전이었다. 냉면 보통 한 그릇과 갈비 두 대를 시켜 먹으면 60전으로 종로의 극장이나 요릿집, 카페, 바 등에서 파하고 술도 깰 겸 출출한 속을 채우는 야참으로 이만한 것이 없어 그 인기가 대단했다.


냉면 한 그릇 가격과 같은 갈비 한대
1930년대 평양냉면집 손님 몰려들어
갈비찜은 신선로 다음으로 고급요리
뼈길이 2~4인치 따라 이동·수원갈비

1961년 대신동 진갈비로 갈비신드롬
서울 마장동 구입 갈비절단기 첫 사용
봉덕동 갈비골목 퍼진 안동마늘양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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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이후 1920년대 초반에 나온 한글 요리책에서는 갈비라 하지 않고 '가리'라고 적었다. 1890년대에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저자 미상의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는 '가리(乫飛)구이'라는 음식 이름이 보인다.

◆최고 선물 갈비

평양냉면집에 손님이 몰려들었고, 손님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냉면과 함께 갈비 두 대를 시켰다. 왠지 가리구이를 달라고 하면 복잡했다. 간단히 줄여서 '갈비 두 대'라고 했다. 이로부터 갈비 하면 가리구이가 되어 버렸다는 주장이다.

1930년 12월7일자 동아일보에서는 강릉의 식당 요리 가격을 기사로 다루었다. 국밥 한 그릇에 15전인데 비해 갈비 한 대는 5전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과 비교하면 갈비구이 한 대 값이 설렁탕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결국 1920년대 이후 갈비구이는 선술집의 술안주에 지나지 않았고, 갈비찜은 요리옥에서 신선로 다음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고급음식이 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갈비찜의 성황은 계속 이어졌다. 외국 사절을 접대하는 연회에서나 요정에서나 명절 가정 요리로 갈비구이보다는 갈비찜이 인기를 누렸다. 이로 인해서 소갈비는 명절 선물로 가장 으뜸에 들었다. 전후의 황폐했던 경제가 제법 안정 상태로 들어선 1960년대가 되면 명절을 앞두고 각 수육 상가에는 소갈비 판매가 그 절정에 달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줄을 이었다.

◆팔도 갈비 명가들

대구보다 훨씬 앞서 소갈비 돌풍을 일으킨 고장은 어딜까. 수원, 포천, 안의, 예산 등이다. 뼈의 길이가 2인치인 것은 '이동갈비' 또는 '불갈비'라 한다. 이동갈비는 1960년대 초 피란 내려온 김정민 할머니가 포천군 이동면 장암리에서 처음 시작하다가 문을 닫고 70년대 김정민 할머니 집에서 주방을 맡았던 주방 아주머니와 조카가 김 할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아 '장암갈비집'이라는 상호로 시작했다. 몇 년 전 '김미자 갈비집'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김미자 갈비집'은 조선간장과 조청을 넣고 끓인 후 양념에 사과나 배 등 과일을 넣어 갈비를 재워 그 맛이 독특하다.

갈비의 길이가 4인치면 '수원갈비'로 불리는데, 수원 갈비는 수원 팔달문 안에 '화춘옥'이 원조집. 화춘옥은 수원 팔달구에서 형 이춘명과 1930년부터 화춘제과점을 하던 이귀성이 일본의 태평양전쟁으로 밀가루 공급이 끊기자 1945년 광복되던 해 수원 영동시장 내 싸전거리에서 소갈비를 듬뿍 넣은 해장국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며 번창했다. 이 과정에 양념갈비를 재웠다가 구워 파는 수원의 독특한 갈비를 탄생시켰다. 화춘옥에서 41년 동안 갈비를 다루었던 문이근은 갈비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이원길을 배출했고 이원길은 갈비 조리업계의 대부로 후진을 배출했다. 지금은 수원 본갈비, 명성옥, 삼부자갈비집 등 수원 갈비의 명성을 이어가는 갈빗집이 많이 생겨났다.

해운대갈비의 경우 수원갈비의 원조인 화춘옥 사장 이귀성이 갈비 재우는 방법을 전수해 주면서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부터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지금은 그 집이 어느 집인지 확실치 않고 다만 해운대에서 암소 갈비 맛이 좋고 30여 년간 갈빗집을 해 온 해운대 '소문난암소갈비집'이 그 명맥을 잘 이어오고 있다. 예산의 '소복갈비집'도 전통을 지키고 있다.

◆대구 갈비의 뒤안길

50년대 말 대구에서 불고기 돌풍을 일으킨 계산동 '땅집'의 흐름을 역이용, 1961년 대신동 타월골목에서 진갈비를 시작해 대구 갈비신드롬을 일으킨 진홍렬. 그는 대구에서 맨 처음 서울 마장동에서 구입한 갈비 절단기를 사용한다. 이후 이 골목에는 우후죽순 갈빗집이 생겨나고 그래서 진갈비가 있는 동산약국 뒷골목을 '갈비골목'이라 했다. 2000년대까지 롱런하다가 지금은 재개발 구역이 돼 휴업 중이고 공사가 끝나면 새로운 진갈비 시대를 열 모양이다. 그 골목의 마지막 주인공 중 한 곳이 '성주갈비식당(현재 서성로로 이전)'이다. 진갈비 길 건너 '국일생갈비'도 갈비 명가라 할 수 있다. 진갈비의 전통은 마늘과 고춧가루를 만나면서 대구식 동인동찜갈비로 진화를 한다.

또한 참기름과 마늘향이 일품인 안동갈비 스타일은 안동 '서울식당'에서 발원, 남구 봉덕동 갈비골목에도 영향을 주고 그리고 수성구 '혜성식당', 달서구 월광수변공원 옆 '참한우소갈비'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수성구 프리미엄 한정식당인 '안압정'은 초창기 비원이란 이름으로 기존 등심 중심의 대구에서 갈빗살 붐을 일으켰다. 이에 앞서 고성동 대창가든, 수성구 신성가든, 서구 한국가든, 남구 앞산가든, 수성구 제주가든 등도 대구를 숯불구이 고장으로 만드는 데 일조를 했다. 이 밖에 경산 자인 남산식육식당도 전국적 명성을 누리고 있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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