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존엄사

  • 허석윤
  • |
  • 입력 2023-04-14 06:54  |  수정 2023-04-14 09:43  |  발행일 2023-04-14 제23면

대구시내 교통표지판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삼거리, 오거리는 있는데 사거리는 없다. 대신 '네거리'로 적혀 있다. 시민들도 그렇게 부른다. 경북지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서울, 부산 등 대부분 도시에선 그냥 사거리라고 한다. 대구경북만의 독특한 숫자 문화인 셈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죽을 사(死)와 같은 발음을 피하려는 것. 건물 4층을 'F'로 표기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인데, 이는 전국이 다 그렇다. F는 'Four'의 첫 글자다.

애초에 우리말도 아닌 한자 발음이 같다고 숫자 '4'를 죽음과 연결 짓는 건 난센스다. 우리 사회의 죽음 강박증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지금도 죽음은 금기어여서, 누구도 이런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애써 외면하고픈 불편한 진실 같은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한국인의 죽음 기피증이 큰 것은 유교문화 때문이다. 알다시피 유교의 세계관은 현세의 삶에 한정돼 있다. 내세관이 없고 죽음에 대한 가르침도 부족하다. 죽으면 끝이라는 믿음은 한국인의 심층의식에 뿌리박혀 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이 괜히 있을까.

문제는 이승이 아무리 좋아도 결국 떠나야 한다는 것. 이 사실은 모를 수가 없지만 대다수는 떠날 준비를 안 한다. 죽음에 임박해서야 공포와 고통에 몸부림친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비참한 죽음도 늘고 있다. 그나마 존엄사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는 건 다행이다. 환자와 가족에게 고통만 안겨주는 불필요한 연명의료는 그만둘 때가 됐다. 본인의 사전의향서를 통한 존엄사가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살 권리'만큼 '죽을 권리'도 중요하다.

허석윤 논설위원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