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시장 '이전 100년' 다양한 사람의 삶이 녹아있는 곳…경제 발전과 아픔 모두 겪어

  • 정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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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04 15:38  |  수정 2023-07-10 17:05  |  발행일 2023-05-04
[서문시장과 상인, 그리고 사람] <1> 지금의 서문시장, 이렇게 시작됐다.
1923년 4월 천황당못을 메우고 현재 위치로 이전해
서문시장과 마주한 상인들의 첫 기억은 '천막' '사람'
1951년부터 2016년까지 총 17회 화재로 아픔을 겪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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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시장 이전 100년을 앞둔 모습. <영남일보 DB>

서문시장이 '이전 100년'을 맞이했다. 서문시장은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성장과 변화의 시기를 겪었다. 긴 역사인 만큼 서문시장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녹아있다. 서문시장 속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과거와 현재를 되짚어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보고자 한다. 관련 영상 바로가기


서문시장의 역사는 조선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초기 서문시장은 대구읍성 북문 밖에 자리 잡은 조금만 향시(鄕市)였다. 이후 17세기 대동법으로 서문시장은 전국 3대 시장으로 발전한다. 당시 서문시장은 유통, 상업, 물류의 중심이었다. 이에 '서문시장에 가면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 없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서문시장은 국채보상운동과 3·1운동의 중심 장소였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을 담당하는 조직인 금영상채회가 서문시장 북후정에 군민대회를 개최해 의연금 모금을 끌어냈다. 또 1919년 3월 8일에는 대구 종교계와 교육계 인사들이 서문시장 한복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운동 연설을 거행했다.

이후 1923년 4월 서문시장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현재 위치에서 서문시장을 열게 된 것. 1923년 대구부는 '시구개정사업'에 따라 약 39만원의 예산으로 천황당못을 메웠다. 주변 정비를 통해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했다. 당시 전체 면적 1만5천 21㎡ 으로 현재 면적(3만4천㎡)보다 절반 정도 작았다. 6·25 전쟁 후에는 대구와 인근의 직물공업을 배경으로 전국 최대 규모의 포목과 주단 도소매 시장이 형성됐다.

서문시장에서 오랜 기간 장사를 이어가고 있는 상인들이 서문시장과 마주한 첫 기억은 '천막'과 '사람'이다. 1974년부터 서문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한 최병천(74)씨는 "어린 시절 마주한 서문시장은 좌판에 할머니들이 식품 등을 쭉 깔아놓고 팔았던 모습이다. 어머님과 장을 볼 때면 뻥튀기, 호떡, 풀빵 등을 얻어먹는 게 낙이었다"면서 "중학생쯤 기억나는 장면은 온갖 재료를 넣고 만든 '꿀꿀이 죽'이다. 당시 20~30원에 판매했는데,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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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부터 서문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최병천씨. 정지윤기자 yooni@yeongnam.com
서문시장 동산상가에서 1983년도부터 40년째 장사를 이어오고 있는 A씨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던 기억이 있다. 점포에 서서 입구를 바라보면 사람들의 머리가 수박처럼 동글동글한 게 가득차보였다"면서 "노점도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시장이 형성돼 있었다. 가면 갈수록 사람 수가 줄어드는 모습을 보는 게 아쉽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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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째 장사를 이어오고 있는 상인 A씨가 동산상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지윤기자 yooni@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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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서문시장 4지구 화재 모습. <영남일보 DB>


서문시장의 다양한 품목 중 빠질 수 없는 것이 '섬유'다. 1950년대 서문시장은 전체 점포의 40%가 섬유 관련 상품을 취급했다. 1960년대는 섬유산업이 국가의 전략산업으로 육성된다. 이에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직물도매업자들이 제조업에 참여하며 섬유산업의 성장을 이끌어 가기도 했다. 1970년대는 서문시장에서 원단이 전국적으로 많이 팔렸다. 당시 1만 2천여 명의 상인이 하루 평균 4만 5천여 명의 손님을 맞이했다. 이후 1990년대까지 섬유 관련 품목이 인기를 얻었다.

최씨는 "학교를 졸업하고 서문시장에서 원단 도매하는 것을 배웠다. 70년대는 면직 등 섬유라고 하면 서문시장이 제일 알아줬다"면서 "섬유 관련 품목이 잘 되다 보니 1·2지구에 부자들이 많았다. 외국에서도 바이어가 찾아오기도 하는 등 서문시장이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상인 A씨는 "60~70년대 당시 서문시장을 와야지 섬유를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서문시장 물건이 가지 않는 지역은 없었다"면서 "섬유 관련 업종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5천만 원어치 물건이 한 번에 거래됐다고 한다"고 했다.

섬유 등으로 과거 서문시장은 계속해서 성장했지만, 시련도 있었다. 그중 서문시장은 '화재' 관련한 많은 아픔을 겪었다. 1951년부터 2016년까지 총 17회의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 이유는 '촛불', '전기합선', '난로 과열' 등 다양했다. 화재는 서문시장 상인들의 삶을 터전을 빼앗았다. 또 다른 형태로 변화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서문시장 2지구는 2005년 12월 화재를 겪은 후 2012년 재탄생했다. 새 상가는 주차장, 승강장, 에스컬레이터 등 편의시설이 들어섰다. 또 방화벽, 화재 비상 시스템 등 안전장치를 갖추며 시장 현대화의 표본이 됐다.

최씨는 "옛날 3지구에 유기그릇 같은 것을 많이 팔았는데, 1976년쯤 화재가 발생했다. 그 자리에 주차장과 소방서가 들어섰다. 3지구에 있었던 상점들은 동산상가로 옮겨갔다"면서 "화재 당시 부모님 나이쯤 되시는 분들이 길바닥에 쓰러져 울부짖는 모습을 봤다. 당시 상황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다. 오래 장사하시는 분 중 화재로 인한 애환이 있으신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지윤기자 yooni@yeongnam.com

영상=이형일기자 hilee@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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