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작전'의 현실판…'통정매매'로 개미를 털다

  • 손선우
  • |
  • 입력 2023-05-15 07:40  |  수정 2023-05-15 08:59  |  발행일 2023-05-15 제12면
SG증권발 주가폭락사태

독자들은 SG(소시에테제네랄)증권발(發) 주가 폭락사태를 지켜보면서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기억을 더듬다 보면 2009년 개봉한 영화 '작전'과 마주하게 된다. "그냥 저평가주에 투자한 거야"라는 영화의 명대사가 '기시감(旣視感)'을 부채질한 것이다. 영화는 주가를 조작하는 증권가의 음지를 그렸다. 증권과 관련된 용어와 주가조작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꽤 그럴싸하다. 물론 영화는 극적 효과를 위해 조직폭력배 두목을 투자업체의 대표로 내세웠다. 증권사 브로커와 재미교포 출신 펀드 매니저, 막장 재벌 2세는 조폭을 돕는다. 작전수행에 필요한 자금줄은 정·재계 인물들의 불법 자금 관리자이고, 작전주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프로 개미'도 연루된다. 이들은 600억원이 걸린 주가조작을 벌인다. 영화와 현실은 차이가 있지만 닮은 점도 적잖다. 그래서 14년 만에 '작전'을 다시 찾아봤다.

2023051401000413200015721
영화 '작전'에서 프로 개미가 주가조작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설명하는 모습. 작은 사진은 주가조작 세력이 회의하는 모습. <네이버 영화 스틸컷>

영화 '작전' 속 주가조작 3요소
현실서 닮은꼴 전개 기시감마저
'남의 말 듣고 感으로 투자하는 이'
SG발 작전 1천명 1兆 손실 추산


1 이유 없는 주가 급등

개미는 주식 투자를 인생을 바꿀 유일한 기회로 여긴다. 선배와 친구의 추천으로 주식에 손을 댔다가 때마침 터진 주가 폭락으로 전 재산을 잃는다. 이후 그는 5년 독학 끝에 실력을 갖춘 '프로 개미'가 된다. 어느 날 작전주 하나를 추격해 7천만원을 벌게 된다. 프로 개미가 주가조작을 눈치챈 건 현재 주가보다 비싼 가격에 대량 주문을 내거나, 때로는 시장가 주문으로 매물 폭탄을 떨구는 식의 '이상 주문' 때문이다.

지난해 국내 도시가스 업체 삼천리와 서울가스의 주가가 꾸준히 상승했다. 증권사에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탓으로 분석했다. 하지만 가스 호재와 무관한 소프트웨어업체 다우데이타와 항만 물류업체 세방, 하림지주, 다올투자증권 등의 주가도 같은 패턴의 상승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애널리스트 사이에서 작전 세력이 개입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주식 커뮤니티 등에서도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여전히 주가가 상승하고 투자는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지난달 24일부터 주가 상승에 연루된 종목들이 개장과 동시에 약 5%씩 하락하다가 오전 9시30분에는 일제히 하한가를 찍었다. 개인 투자자들 사이에서 주가조작설이 나오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2 개미를 향한 유혹

"너 '통정거래'라고 아냐?" 작전을 짜는 증권사 브로커는 프로 개미에게 '작전의 꽃'을 설명한다. 빈 잔에 절반가량의 술을 따르고 이를 주식에 비유한다. 그는 가격을 조금 더 올려 재미교포 출신 펀드 매니저에게 넘긴다. 그러면 펀드 매니저는 가격을 좀 더 올려 프로 개미에게 넘긴다. 프로 개미는 또 가격을 올린 뒤 증권사 브로커에게 주식을 넘긴다. 하지만 이렇게 오른 주식은 살 수가 없다. 이들끼리 거래량과 시간을 정확히 맞춰놨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사고팔기 때문에 끼어들 틈새가 없다. 주식은 이렇게 반복해 오를 만큼 오르고 주가를 상승시킨 이들은 빠진다. 개미들은 달려들어 던진 주식을 덥석 문다.

주가조작 세력으로 지목된 투자컨설팅업체는 고액 자산가를 투자자로 모집한 뒤 투자자에게서 휴대전화와 신분증을 넘겨받아 증권사 계좌를 개설했다. 설계자는 차명 휴대폰을 이용해 고객 계좌를 직접 손쉽게 관리했다. 경찰이 압수한 휴대전화만 200대가 넘었다. 이들은 한 휴대폰으로 사고팔고, 다른 휴대폰으로 다시 사고파는 식으로 매매했다. 가령 두 대의 휴대전화로 주가를 올린다면 한 대의 명의로 거래량이 적은 주식을 골라 100주를 사고 더 높은 가격에 매도 주문을 낸다. 그러면 다른 휴대폰 명의의 계좌로 100주를 매수했다가 더 높은 가격으로 다시 매도 주문을 낸다. 이를 반복하면 주가는 올라가 있다.

3 유명인 개입과 주식투자

전직 조폭의 주가조작 방식은 증시에 상장된 부실한 건설회사의 주식을 미리 사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건설사가 유망한 기술을 가진 벤처기업을 인수한다는 소식을 시장에 퍼뜨린다. 건설사의 주가가 오르면 그동안 사들인 물량을 되판다. 막장 재벌 2세의 부실 건설사를 활용하고 주가 상승이 얼추 둔화됐을 때 외국계 펀드를 굴리는 재미교포 펀드 매니저는 외국 자본처럼 매수해 주가를 끌어올린다. 족집게 애널리스트로 유명한 증권방송 전문가는 대놓고 작전주에 대해 바람을 잡는다.

주가조작 세력이 작전을 기획한 건 3년 전으로 추정된다. 긴 시간 계속 투자금이 늘어나자 정·재계, 문화계, 체육계 인사들이 모집책을 자처해 새로운 투자자들을 끌어모았다. 유명 가수 임창정이 연루됐다. 이들은 피해자를 자처하지만 여론은 급격히 나빠졌다. 특히 임창정의 경우 주식시장의 비밀을 알아냈다며 긴 시간 성공한 투자자로 행세하던 투자컨설팅업체 대표를 종교에 빗댄 영상이 공개돼 피해자로만 주장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그는 주가조작 의심 세력이 주최한 파티에 참석한 것에 대해 "당시 모임 분위기를 위해 일부 오해될 만한 발언을 한 건 사실이지만 투자를 부추기진 않았다"고 해명했다.

4 주식판의 교훈

프로 개미가 주식에 뛰어든 계기는 '난 이렇게 10억원을 만들었다'는 주식 투자 관련 서적의 저자 때문이다. 전설적인 슈퍼 개미로 통한다. 슈퍼 개미는 자신의 책으로 주식을 배웠다는 프로 개미의 말에 정색하며 헛배웠다고 일갈한다. "그 책, 나한테 별로 자랑스럽지 않은 기억이야. 그 책 내고 정확히 6개월 만에 무일푼이 됐네. 자네들 말대로 깡통을 찬 거지. 하루 만에 2~3배씩 크거나 망하는 회사는 없어. 근데 주식시장에서는 말이야, 하루에도 몇천억 원씩 생겼다가 없어져. 그게 무슨 의미겠나. 아무 의미도 없는 거야. 욕심들이 엉켜 있을 뿐이지. 그걸 알고부터 투자할 때 주가를 보기 전에 먼저 사람을 보게 되더군. 진짜로 일을 하는 사람인지 말이야."

주가조작의 의혹이 커지고 나서야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번 폭락 사태 관련자 수는 약 1천명에 달하며 손실 추산 금액은 총 8천억~1조원 사이로 추산된다. 일각에선 피해자로 주장하는 이들이 '피해호소인'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기 피해가 아닌 '투자 실패'라는 뜻에서다. 무지성 투자로 손해를 보니 피해자인 척 동정심을 호소한다는 뜻에서다. 사실 수익금 발생과 입금과정까지 상세한 내용은 모른다고 해도 본인들이 직접 수익금의 절반을 전혀 알지 못하는 법인에 수수료로 나눠 입금했다면 정상거래가 아닌 것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주가조작의 핵심은 '개미 털기'다. "요즘 글로벌 경기 침체니 유동성 위기니 말이 많아도 대한민국에 주식만 한 재테크가 없죠. 개미라고 들어보셨죠? 남의 말 듣고 감으로 투자하시는 분들. 그 사람들 있는 한 대한민국 주식시장은 끄떡없어요." 자신만만한 태도로 주가조작을 설계하던 일당의 말이다. 손선우기자 sunwoo@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경제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