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태의 제3의 눈] 타이 총선, 개혁 명령을 받다…피타의 전진당, 왕실·군부 개혁전선으로 전진할까

  • 정문태 방콕특파원·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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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24 08:35  |  수정 2023-05-24 08:35  |  발행일 2023-05-24 제24면
42세 피타 대표가 이끄는 전진당
젊은 유권자들 개혁 열망 힘입어
이달 14일 총선에서 예상 밖 승리
7개 정당과 연립정부 합의했지만
피타 총리 승인 의석수 부족 상황
불경죄·징병제 폐지 반발도 직면

THAILAND-ELECTION/
타이 전진당의 당수이자 총리 후보인 피타 림짜른랏이 지난 15일(현지시각) 방콕의 당 본부에서 총선 개표 상황을 지켜본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전진당은 2014년 이후 집권한 보수 정당과 군부 지원 정당 연합을 제치고 총선에서 전국 득표율 1위를 차지했다. 연합뉴스

한가로운 화요일 아침, 단골 커피숍 일꾼들이 손님을 기다리며 재잘재잘. "새 총리 뽑고 정부 구성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완(29)은 사뭇 급한 듯. "하루라도 빨리 새 정부 들어서야지 지긋지긋해." 폰(39)이 맞장구. "설마 군인들이 또 나서진 않겠지." 녹(34)은 걱정스레.

지난 14일 타이 총선에서 반군부 개혁을 외친 전진당(MFP)이 승리하자 시민사회가 한껏 달아오르며 저마다 유쾌한 조급증을.

"총선 결과 59.39%가 아주 만족, 30.07%가 만족. 다시 선거를 해도 똑같은 투표를 하겠다는 시민이 86.49%." 국립개발행정연구원(Nida)은 총선 기운이 채 가시지도 않은 이틀 만에 여론조사로 쐐기까지 박아 분위기를 띄웠고. 하원 500석을 놓고 겨룬 이번 총선 결과는 한마디로 변화를 바라는 시민의 '도발'로 볼 만했다.

"시민은 지난 10년 동안 (군인정치로 고생) 충분했습니다. 이제 새날이 왔습니다." 마흔두 살 먹은 피타 림짜른랏(Pita Limjaroenrat)이 이끈 전진당이 152석을 차지해 제1당이 되리라 예상한 이들은 별로 없었다. 마찬가지로 2001년 총선부터 단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프어타이당(PTP)이 141석으로 제2당이 되리라 여긴 이들이 드물었듯이.

달리 2014년 쿠데타로 권력을 쥔 쁘라윳 짠오차의 루엄타이쌍찻당(UTN·36석)과 쿠데타 패거리로 국방장관을 지낸 쁘라윗 웡수완의 팔랑쁘라차랏당(PPRP·41석)이 저물 것이라는 예상쯤이야 모두가 했지만.

총선 결과를 놓고 보면 전진당의 승리는 예사롭잖다. 무엇보다 전진당은 방콕 33석 가운데 32석을 얻어 수도를 움켜쥔 데 이어 프어타이당의 전통 요새인 치앙마이 10석 가운데 7석을 차지해 지역 선거구 총 400석에서 113석을 쓸어 담았다. 그리고 100석이 걸린 정당 명부 유효 투표 3만697만 표 가운데 1만417만 표를 얻어 39석을 챙겼다. 이건 전진당이 정치 심장부를 점령했을 뿐 아니라 전국적 지지를 얻었다는 뜻이다.

이번 전진당 승리의 뒷심은 '절망'과 '희망'이라는 두 상극이 한데 어울린 것으로 볼 만하다.

"이젠 지쳤다. 정치판 싸움이 벌써 19년째다. 군부도 프어타이당도 다 한통속이다. 해서 변화를 바라며 표를 던졌다." 탁신과 프어타이당 광팬이었던 치앙마이 건축가 짤른 폰사논(56)처럼 숱한 이들이 해묵은 정쟁에 지친 절망감을 전진당이라는 대안에서 찾았듯이.

"불경죄와 징병제 폐지 같은 정치 개혁은 군부나 고리타분한 정치인한테 맡길 수 없다. 우리 같은 젊은 정당과 정치인이라야 현대화가 가능하다." 방콕 탐마삿대학 학생 수티차이 완깨오(21) 같은 이들이 젊음에 희망을 걸고 전진당을 택했듯이. 실제로 유권자 4천200만명 가운데 41세 이하가 41.7%에 달한 사실은 눈여겨볼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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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현지시각) 타이 방콕에서 열린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민주화 정당 간 양해각서 서명식에서 지난 14일 총선을 통해 최다 의석을 차지한 피타 림짜른랏(앞줄 왼쪽 넷째) 전진당 대표와 연립정부 파트너인 7개 정당 지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날 8개 정당은 피타를 총리로 하는 연립정부 구성에 합의했다. 연합뉴스

시민 열망을 안은 전진당은 이제 타이 정치 개혁의 한복판에 섰다. 월요일 저녁 전진당은 프어타이당과 쁘라차찻당(9석)을 비롯한 7개 정당과 양해각서에 서명해 313석짜리 연립정부 구성의 첫발을 디뎠다. 그러나 전진당 앞에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숱하게 널렸다. 무엇보다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피타 림짜른랏의 차기 총리 승인 건부터 만만찮은 과제다. 2017년 군부가 만든 타이 헌법은 하원 500석과 상원 250석 양원이 총리를 뽑도록 못 박았다. 피타 연립정부는 양원 합동 750석 가운데 헌법이 요구한 과반을 넘기려면 63석이 모자라는 형편이다. 이건 피타와 타이 정부 운명을 군부가 지명한 상원 250석이 쥐고 있다는 뜻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전진당이 피타를 총리로 내세워 연립정부를 구성하더라도 정치 개혁안을 밀어붙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탓이다. 전진당이 내세운 양해각서 13개 조항을 보면 곳곳에 지뢰밭이 깔렸다. 헌법과 사면법 개정은 의회 내 정쟁으로, 탈중앙 지역분권화와 예산 재편성과 정부 투명성 확보는 관료주의의 도전으로, 동성 결혼 허용은 사회적 반발로, 토지 개혁과 산업 독점 폐지는 이권 마찰로 몫몫이 분쟁을 예고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전진당 공약의 고갱이인 왕실개혁과 군부개혁이 남았다. 비록 전진당이 7개 정당과 맺은 양해각서에서는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겠다'며 왕실 개혁을 제외했으나 피타는 "왕실 개혁안이 존경받는 국왕의 불가침 지위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안은 의회에서 다룰 것"이라며 여운을 남겼다.

곧장 피타는 의회와 사회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았다. "전진당의 왕실 개혁안은 국가 핵심기관(왕실)을 침해하고 손상시킬 수 있다. 이 사안은 헌법재판소 판결로 정당 해산 결과를 낳을 수 있다." 22일 보수 사회운동가 티라윳 수완깨손 변호사가 선거관리위원회에 전진당을 고소했듯이. 티라윳은 전진당 전신인 미래전진당(FFP)이 정당법 위반으로 해산당하고 타나톤 쭝룽르앙낏 대표가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은 2020년 사태 때도 고소장을 낸 인물이다. 같은 날 상원의원 폰팁 로짜나수난도 "왕실 보호를 위해 뛰쳐나온 사람들을 얕보지 말라. 전진당의 승리가 타이 시민 모두를 대표하지 않는다"며 피타한테 으름장 놓으며 대들었고.

게다가 프어타이당을 비롯한 연립정부 파트너들도 저마다 왕실 개혁안에 거부감을 드러낸 상태라 전진당이 호락호락 손댈 수 있을지 못내 의심스럽다.

이 왕실 개혁안은 징병제 폐지, 쿠데타 영향을 받은 시민의 정의 회복을 비롯한 군부 개혁안과 맞물려 또 다른 정변의 밑감 거리가 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군부는 타이 현대사를 통틀어 왕실 보호를 내걸고 정치판을 주물러온 조직이다. 쿠데타 때마다 왕실을 앞세운 전통은 언제든 현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군부는 이미 병력 보충을 위해 징병제 강화를 내걸며 전진당의 공약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마디로 군부에 손대지 말라는 경고장을 날린 셈이다.

"전진당의 앞날도 개혁의 성패도 모조리 군부에 달렸다. 아직 군부가 정치판에서 손 뗄 신호로 볼 만한 게 없다. 타이에서 군인들은 언제든 이권을 향해 탱크를 몰고 나올 수 있다. 이번 정치 변혁기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사회평론가 수팔락 간짜나쿤티 말처럼 군부는 여전히 타이 정치를 을러대는 존재다.

1932년 입헌군주제 뒤부터 19번이나 쿠데타로 정치판을 뒤엎은 게 타이 군부다. 그 결과 91년 타이 현대사에서 무려 62년이나 군인이 정치판을 주물러 왔고 총리 29명 가운데 11명이 장군이었다. 기껏 29년 시민정부에서 임기 4년을 다 채운 총리는 오로지 탁신 친나왓 하나뿐이었다. 그 나머지 17명은 쿠데타 뒤치다꺼리 총리로 잠깐씩 머물다 갔을 뿐이고.

"쿠데타란 단어는 군사사전에서 지웠다." 선거 이틀 전 군사령관 나롱빤 찢깨우때가 한 말을 시민이 곧이듣지 않는 까닭이다.

"남큰해립딱(밀물 때 빨리 물을 퍼내라)." 타이 사람들이 즐겨 쓰는 속담이다. 우리말로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쯤 될 법한데, 요즘 타이 정치판을 보며 떠오른 말이다. 물은 이미 들어왔다. 이제 노를 어떻게 젓느냐는 피타와 전진당 몫이다. 기회는 결코 두 번 오지 않는다. 한낱 152석 의회보다는 든든히 지지해준 시민을 믿고 개혁전선으로 배를 몰아야 하는 까닭이다. 격랑을 뚫고 갈 피타와 전진당의 노 젓기는 이번 총선에서 시민사회가 내린 명령이다. 정상 국가로 되돌아갈 타이에 행운을 빈다.

〈방콕특파원·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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