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태의 제3의 눈] '작은 버마' 매솟의 큰 희망…철조망 너머 고국을 향해 '시민혁명의 승리' 부르짖다

  • 정문태 방콕특파원·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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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07 08:42  |  수정 2023-06-07 08:45  |  발행일 2023-06-07 제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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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쿠데타 전까지 버마와 타이 시민이 자유롭게 건너다녔던 모에이강 선착장에 철조망이 쳐졌다. 강 건너 건물이 보이는 쪽은 버마의 먀와디이며 철조망은 타이쪽 매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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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아이돌 출신 인기 가수 크리스 물러는 매솟에서 노래로 반독재 민주항쟁을 벌여왔다.
속뜻을 알 수 없는 노래, 그러나 듣는 내내 심장만큼은 거칠게 뛴다. 이 절에선 절로 콧노래가 따라 나온다. 이게 노래의 힘인가 보다! 진한 감동, 조심스레 한 번 더 부탁한다. 가수는 기꺼이 다시 기타를 품에.

열정적인 노래가 끝났다. 내친김에 노랫말을 받아 적는다. 버마 노랫말을 영어로 옮긴다는 게 영 만만찮다. 가수도 통역도 진땀을.

"선조들은 자유와 평등을 원했다/ 두려움 넘어 혁명은 시작되었다/ 부모들은 길바닥으로 뛰쳐나갔다/ 희망의 대물림을 위해// 거짓 역사는 여전히 기록되고/ 피비린 조국은 여전히 눈물을/ 일그러진 역사를 지워 버리리/ 스프링 레벌루션과 함께// 혁명, 새날의 빛을 위해/ 혁명, 용기와 전진으로 / 스프링 레벌루션 민주연방을 향해"

스물다섯 먹은 크리스 물러가 만들고 부른 노래 '민주연방을 향한 스프링 레벌루션' 가운데 몇 구절이다. 뜻은 통하는데 당최 시로 옮겨낼 수가. "머리가 아닌 심장으로 부르는 노래라…." 2019년 스카이넷 채널9의 '미얀마 아이돌' 출신으로 큰 인기를 누려온 물러는 겸연쩍은 듯.

모에이강을 끼고 버마의 까렌주와 맞댄 타이 국경 도시 매솟, 오락가락하는 비가 오히려 불볕더위를 더 지핀다. 온 천지가 44~45℃ 불판이었던 4월 말 취재 때보단 좀 수그러들었나 했더니 웬걸 아직도 40℃를 오르내린다. 30년 넘도록 매솟 국경을 드나들었지만 올해처럼 길고 잔인한 무더위는 처음이다.

노래 한 곡을 뽑은 물러도, 둘러앉은 5인조 코미디언 그룹 '하응아까웅'도, 아나운서 아엔드라 아웅도 모두 땀범벅. 조국 버마를 떠나 남의 나라 국경 한 귀퉁이에 숨어 지내는 이들한테나 이야깃거리를 찾아 몰래몰래 쫓아다니는 나한테나 이 더위만큼은 아주 공평하게.

2021년 2월1일 버마군 사령관 민아웅흘라잉이 쿠데타로 정치판을 뒤엎고부터 180만명이 집을 잃었고 5만2천명이 이웃 나라로 피했다. 그 가운데 2만2천400명이 체포령에 쫓겨 물러처럼 하응아까웅처럼 또 아엔드라처럼 타이 국경을 넘었다. 그 고단한 발길들이 향한 곳, 바로 매솟이었다.


버마 까렌주 맞댄 타이 국경도시
조국 떠난 전사들 숨어든 해방구
타이 경찰에도 쫓기며 민주 항쟁

아이돌 출신 가수 투쟁 노래하고
아나운서는 '지하방송' 뉴스 전파
코미디언 그룹은 재원 마련 공연



방콕에서 북서쪽으로 492㎞ 떨어진 매솟은 예부터 타이-버마-인디아를 잇는 무역로 노릇을 한 데다 까렌, 몬, 샨을 비롯한 소수민족들 삶터로 다양한 문화를 꽃피웠다. 2000년대 들어 매솟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이른바 아시안 하이웨이(AH1)가 지나는 관문 도시로 주가를 올린 데 이어 2015년 딱경제특구(SEZ)에 편입되면서 그해 수출 640억밧(2조3천680억원)으로 타이 경제에도 크게 한몫했다.

그러나 현대사에서 매솟의 가치는 따로 있다. 바로 버마의 숨통이었다. 매솟은 1962년부터 버마의 장기 군사독재가 낳은 정치적 경제적 실정을 피해 숱한 버마인이 흘러들면서 '작은 버마'란 별명을 얻었다. 으레 매솟의 버마인 수를 또렷이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인구 조사에 뜬 10만5천명 말고도 통계에 안 잡힌 난민과 이주노동자가 적어도 10만명은 넘을 것으로 여길 뿐. 이 버마인 20만명은 현재 공식적인 매솟 인구 12만명의 두 배나 되는 셈이다.

그러니 매솟의 버마화는 눈과 귀와 냄새로도 이내 드러난다. 도심 곳곳엔 버마어로 쓴 안내판이 즐비하고 길거리엔 노란 따나카(나무껍질로 만든 전통 화장품)를 바른 여인과 론지(치마 형태의 전통 의상)를 걸친 남자들이 넘쳐난다. 식당이나 시장통엔 아예 버마 말이 귀를 때리고 로힝가(전통 쌀국수)와 응아삐(생선, 새우를 발효시킨 젓갈) 냄새가 온통.

"매솟이 없었다면 버마 경제도 정치도 오래전에 끝장났다. 타이 정부한테 구박받고 경찰한테 쫓기면서도 우리가 매솟을 고맙게 여기는 까닭이다." 1988년 버마 민주항쟁을 이끈 뒤 매솟으로 넘어와 망명버마노동조합에다 노동자 아이를 위한 학교까지 세운 탄독(60) 말마따나 매솟은 일거리를 찾아오는 버마 노동자들 삶터일 뿐 아니라 버마 정변 때마다 항쟁 발판이 되었다. 1961년 네윈 장군 쿠데타로 쫓겨난 우누 전 총리가 1971년 저항조직을 꾸렸던 곳도, 1988년 민주항쟁 뒤 체포령을 피해 숱한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던 곳도, 2021년 쿠데타 뒤 망명 지하 민족통합정부(NUG)가 터를 다진 곳도 모두 매솟이었듯. 게다가 매솟은 1948년 버마 독립 뒤부터 자치 독립투쟁을 벌여온 까렌민족연합(KNU)을 비롯한 버마 내 소수민족 무장조직들의 통신과 보급 기지 노릇까지 해왔다. "매솟은 버마의 항쟁 수도다." 까렌민족연합 의장 끄웨뚜윈 말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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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풍자로 이름 날린 코미디언 그룹 하응아까웅은 매솟을 발판 삼아 현장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3대에 걸친 버마 반독재 민주항쟁, 이제 매솟의 주인공들이 바뀌었다. "우린 쿠데타 뒤 집으로 들이닥친 군인들을 간발 차이로 따돌리고 국경을 넘었다. 우린 여기 싸우러 왔다." 정치 유머로 이름 날린 하응아까웅의 리더 뿌레이(35)는 입술을 깨물며 동료들과 함께 '에이세이'(수면제) 한 토막을 기꺼이 선보인다. "싸우자고 맹세한 이들 가운데 하나가 정치 토론 중에 잠들어버린 건 시민을 깨우겠다는 유머다." 넋 놓고 쳐다보던 물러가 낄낄대며 덧붙인다. 뿌레이는 곧 까렌민족연합 해방구로 들어가 현장 공연을 하겠다며 의지를 다진다. "재원 마련하는 동안만 매솟에 머물 생각이다. 우린 버마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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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아엔드라 아웅은 망명 민족통합정부 지하방송을 통해 민주혁명을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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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을 가로지르는 버마인 불교도 행렬처럼 매솟은 '작은 버마'로 불린다. 사진=정문태 방콕특파원
멀찍이 바라보던 아엔드라(25)는 방송 시간에 맞춰 급히 화장을 고친다. 랭군의 온라인 미디어 〈17TV〉에서 뉴스와 교양 프로그램을 맡았던 아엔드라는 망명 민족통합정부가 세운 지하방송 〈PPTV〉 아나운서로 싸움판을 옮겼다. "체포령을 피해 국경을 넘었지만 독재 군인들에 맞선 싸움은 이제부터다. 민족통합정부에 힘 보태는 건 시민 의무다." 아엔드라는 옛 동지들과 함께 매솟에서 〈먀에랏아딴TV〉로 만달레이와 사가잉을 비롯한 버마 중부에 혁명 뉴스를 전하는 바쁜 나날을 보낸다고도.

1988년 민주항쟁 뒤부터 봐온 매솟의 버마인 사회는 겉보기에서부터 크게 달라졌다. 전엔 난민과 망명이 주였다면 이젠 투쟁으로 바뀌었다. "그냥 도망 온 게 아니다. 우린 매솟을 전선으로 여긴다." 물러 말처럼 2021년 쿠데타 저항 세대들은 몫몫이 지닌 '무기'로 군인 독재에 달려들었다. 가수도 코미디언도 방송인도 저마다 매솟을 최전선으로 여기면서.

"버마에선 군인들한테 쫓기고 매솟에선 타이 경찰한테 쫓기는 신세지만 두려움 탓에 물러설 순 없다. 버마 안에선 목숨 걸고 싸우는 형제들에 견줘 우린 그나마…." 하응아까웅 그룹 따잉쪼(35)는 목이 메인 듯 한동안 뜸을 들인 뒤 "우리가 싸워야 하는 까닭"이라며 결의를.

2023년 5월, 매솟 버마인 사회 기운이다. 아직 버마의 민주혁명 성패를 말하긴 이르지만, '작은 버마' 매솟의 희망은 시들지 않았다. 감시와 체포와 추방의 공포 속에서 묵묵히 싸우는 이들이 살아 꿈틀대는 까닭이다.

혁명은 안팎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승리의 깃발을 꽂는다. 역사의 교훈을 따라 매솟을 아스라이 바라본다. 무더위를 몰고 갈 장대비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버마 시민혁명의 승리를 바라며.

〈방콕특파원·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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