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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철 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
시국선언을 한다고 해서, 퇴진시위를 한다고 해서 정권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는다. 단시간에 전복되지는 않는다.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민주시민은 잘못이 누적되는 것을 지켜본다. 누적되고 누적돼 민심마저 돌아서면 정권은 끝장이 나고 만다.
전두환은 졸지에 정권을 잡게 됐다. 당시 군부독재 타도의 함성이 전국을 휘몰아쳤다. 막바지였던 1979년 김재규에 의한 10·26이 일어났다. 하지만 국운은 시민의 열망과는 달리 전개됐다. 전면에 나선 전두환은 노태우와 12·12를 결행해 정권을 장악, 1980년 8월 유신헌법에 따라 한 번, 1981년 2월 간선 체육관 선거로 한 번, 제11·12대 대통령에 오른다. 18년5개월간 장기집권에 이어 군부독재가 다시 연장되면서 시민은 직선제 민주주의를 더욱 목말라 했다. 또다시 내가 아닌 나라를 위해 대학과 종교계는 시국선언을, 학생은 정권 퇴진시위를 계속했다.
1981년 5월에는 김태훈 열사(1959년생·서울대 경제학과 78학번)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중 교내에서 침묵시위를 벌이던 학우들이 경찰에 의해 구타당하는 것을 보고 창문을 뜯어내고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세 번 외친 뒤 투신자결했다. 1983년에는 황정하 열사가 사복경찰에 쫓겨 몸을 피하다가 추락사했다. 1985년엔 송강열 열사가 분신자결했다. 1986년엔 김세진, 이재호, 이동수, 박혜정, 진성일 열사가 몸을 던졌다.
투신·분신에 이어 1987년 들어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해버렸다. 그해 1월14일 박종철 열사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숨졌는데 정부는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터무니없는 발표를 해 공분을 샀다.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정부는 애써 차분해하는 듯 그해 4월 4·13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체육관 간선후보로 노태우가 지명됐다. 민주화불꽃 심지는 타올랐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5월18일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의 은폐조작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6월9일 그만 이한열 열사가 시위과정에서 경찰이 직격으로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사경을 헤매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7월5일 사망). 시민은 격분했다. 다음날인 6월10일부터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구호로 민주화운동은 폭발했다. 전국으로 번져갔다. 사회직장인도 동참했다. 민심은 돌아섰다. 노태우도 6월29일 두 손 들고 직선제를 수용했다. 민주화였다. 직선개헌 민주주의는 박정희(제5·6·7·8·9대 대통령)집권기 중 10월유신(1972년)부터 치더라도 15년이 걸렸다. 얼마나 고귀한가. 6·10은 민주항쟁기념일이 됐다. 얼마나 기념할 만한 날인가.
윤석열 검사는 대통령 준비를 따로 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민주화 덕을 본 민주 직선 대통령이다. 그런데 퇴진요구 시국선언이 학계·종교계에서 잇따르고 있다. 대학가와 노동계 시위도 계속된다. 정권 초기에도 '윤석열 퇴진!'은 민주화시대이기에 가능했다. 이를 되돌아보고 대통령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계기로 삼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MBC 공격, KBS 시청료 분리징수 등 자꾸 '전통(全統)' 시대 '땡전뉴스' 전철을 밟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검찰이 과거 권력의 시녀였듯 KBS·MBC 방송 또한 권력의 나팔수였다. 민주화 이후 방송이 제자리를 찾은 게 아닌가. 회귀, 퇴행을 원하는가. 민주항쟁이 없었다면 어떤 '민주'가 남아있겠는가.
2007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6·10민주항쟁기념일, 올해 정부는 참석하지 않았다. 외면했다. 사유를 뭐라고 말하는 것 같다. 민주화를 위해 몸 바친 열사들이 보고 있다.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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