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이병철과 조홍제, 서울로 오다](https://www.yeongnam.com/mnt/file/202307/2023072301000706400029262.jpg) |
1927년대 와세다대학 전경. <와세다 대학교 홈페이지> |
![[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이병철과 조홍제, 서울로 오다](https://www.yeongnam.com/mnt/file/202307/2023072301000706400029264.jpg) |
부관페리 쇼케이마루(창경환). <부관페리 주식회사> |
![[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이병철과 조홍제, 서울로 오다](https://www.yeongnam.com/mnt/file/202307/2023072301000706400029263.jpg) |
함안 군북면의 조홍제 생가. <홍하상 촬영> |
◆조홍제, 이병철의 인연
자가용은 털털거리며 비포장길을 달렸다. 대구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멀었다.
1948년 12월 말, 조홍제와 이병철은 이제 대구를 떠나 서울에서, 해방된 조국에서 큰 사업을 벌이기 위해 상경하는 중이었다. 차 안에서 두 사람은 기대반, 두려움 반으로 말이 없다. 옛날 일이 떠올랐다.
1927년 꽃피던 봄의 일이다. 어느 날 함안 군북면의 조홍제 집에 불쑥 이병철이 찾아왔다. 함안이 고향인 조홍제는 걸어서 한 시간 반 거리인 의령의 동갑내기 친구 이병각(이병철의 친형) 집을 자주 갔었다. 이병철은 대뜸 조홍제에게 돈 500원을 빌려 달라고 했다. 당시 순사의 월급이 겨우 5원이었던 시절이었으므로 500원은 거금이었다. 조홍제가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한가를 물었더니 이병철이 일본에 유학가기 위한 자금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조홍제도 사실은 나도 일본에 유학가고 싶은데 같이 가는게 어떻겠는가 하고 말했다. 결국 두 사람은 거금 1천원을 준비하고 유학을 떠나게 된다.
당시 이병철의 본가는 천석꾼이었으나 조홍제 집안은 무려 6천석꾼이었고, 더구나 조홍제는 장손이었다. 이병철이 일본 유학을 가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펄쩍 뛰었다. 서울 유학에서 돌아온 막내아들이 상투를 자르고 집에 나타났을 때도 충격을 받았는데, 그런 그가 이번에는 일본 유학을 가겠다고 하자 이병철을 창고에 가두겠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병철은 유학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부모님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서 일본으로 유학을 갈 생각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병철은 매우 당찬 청년이었던 것 같다.
◆와세다 유학생 조홍제, 이병철
부산항. 부관 연락선이 뱃고동을 울렸다. 1927년 8월 초, 조홍제 21세, 이병철 18세. 두 청년은 시모노세키로 가는 부관 연락선에 올랐다. 당시의 부관 연락선은 일본에 유학가는 한국의 유학생들이라면 거의 대부분 이용하는 항로였다. 1923년부터 당시 부산과 시모노세키 간에는 4천t급의 쇼케이마루 외에 두 척의 배가 더 왕래했다.
아침 7시에 출항한 배는 현해탄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배가 부산항을 떠나 한바다에 이르렀을 때, 배멀미를 느낀 이병철은 선실에서 갑판으로 나갔다. 거기서 그는 우연히 의령출신인 철학자 안호상 박사(1898~1999, 훗날 초대 문교부 장관 등 역임)를 만난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대주던 백산상회의 사장 안희제와 한집안 간이다. 안호상은 일본의 명문 교토대학에서 1년 동안 서양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도일하는 중이었다.
1927년 거금 1000원 들고 日 유학길
일등선실서 일본인 형사에 멸시당해
이병철에 잊을 수 없는 모멸감 남아
일본인에 안 진다는 자존심 원천돼
실제로 와세다大 출신 기업가 많아
이병철 경영학과, 조홍제 기계과 입학
유학 중 틈만 나면 일본공장 살펴봐
인연으로 마산양조장·삼성상회 동업
파도가 거세어져서 배의 요동이 심해졌다. 세 사람은 배멀미가 더 심해져 자신들이 묵고 있는 이등 선실보다는 시설이 좋은 일등 선실로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자 일등 선실 입구에 서 있던 일본인 형사가 그들을 저지하였다. 옷차림으로 한국인임을 알아챈 일본인 형사는 거만하게 말했다.
"너희들 조선인이 무슨 돈으로 일등 선실을 기웃거리느냐, 건방지다"라면서 세 사람의 신분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돈을 듬뿍 가지고 놀러 가는데 기왕이면 일등실로 가려는 거요." 안호상이 비꼬는 투로 대답했다.
세 사람은 일본인 형사의 모욕적인 언사에 분노가 솟구쳤으나 간신히 억눌렀다. 자신이 식민지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망한 나라의 백성이 이처럼 슬프다는 사실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꼈다. 마음속으로 그는 한국이 강한 독립국가가 되어야만 이러한 멸시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수치와 모멸감은 이병철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고, 일본인에게는 어떤 것이라도 지고 싶지 않은 자존심의 원천이 된다.
시모노세키에서 배를 내린 세 사람은 거기서 기차로 갈아탔다. 시모노세키 역에서 탄 완행열차는 히로시마를 거쳐 오사카를 지나 동해도 본선을 타고 도쿄까지 약 1천㎞를 올라가게 된다. 열차는 느렸다. 열차는 무려 이십여 시간이나 걸려서 1천㎞ 떨어진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는 개명천지였다. 이때 지하철이 다니고 있었고, 거리에 자동차가 수도 없이 굴러다녔다. 긴자에는 3, 4층의 유럽스타일 대리석 건물이 즐비했다.
대학에 입학하기까지에는 아직 7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조홍제와 이병철은 우선 하숙집을 정하고 입시 준비를 하기로 했다. 조홍제는 와세다 공대에서 기계학을 공부할 생각이었고, 이병철도 와세다 대학 경영학과에서 일본 경제를 배울 생각이었다. 조홍제는 도쿄의 중심인 치요다구의 후시미에 하숙집을 잡고, 이병철은 조금 변두리인 시누타이라는 곳에 하숙집을 얻었다. 거기서 두 사람은 각기 도쿄의 명문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백방으로 정보를 구한 후 수험준비에 들어갔다.
조홍제는 와세다 공대 기계과에 응시했고, 합격했다. 이병철도 와세다대 경영학과에 합격했다. 그의 나이 20세때였다. 그러나 조홍제는 와세다 기계과를 한 학기 만에 중퇴하고 호세이 대학 경제학과에 다시 입학하게 된다. 자기가 생각한 방향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와세다 대학은 잘 알려지다시피 게이오 대학과 더불어 일본의 양대 명문 사립대학이다. 와세다는 경영학이 강한 학교이다.
◆일본재계를 움직이는 와세다 대학
실제로 일본에는 와세다대학 출신의 기업가 중에 쟁쟁한 사람들이 많다. 그 대표적인 경영자로 우선 일본 '지하철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야카와 노리쯔구(早川德次·1881~1942)는 이 학교의 법과 졸업생이다. 그는 런던에 출장 가서 지하철을 처음 본 후 도쿄에도 지하철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졌고, 그의 나이 34세 때인 1915년에는 파리와 뉴욕의 지하철에 대해 조사했다. 1920년 39세때 도쿄지하철 주식회사를 설립한 후 그 2년 후에는 우에노와 아사쿠사 간의 지하철 2.2㎞를 개통했고 이어 도쿄의 중심가인 신바시까지 그 노선을 연장시킨 바 있다.
오하라 마고사부로(大原孫三郞·1880~1943)도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일본 주고쿠(中國)지방의 유수한 기업인 구라시키(倉敷)방적, 중국은행, 주고쿠전력 등의 창업주이다. 백화점그룹으로 유명한 세이부(西武)그룹의 창업주 쯔즈미야쓰 지로(堤康次郞·1889~1964)도 와세다대학 정치학과 졸업생이다. 소니의 창업주이자 일본경영의 '3명의 신(神)'중의 한 사람이라는 이부카 마사루(井深大·1908~1997) 역시 와세다대학 전기공학과 졸업생이다.
◆일본 한복판에서 금융대공황을 겪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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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
조홍제,이병철이 일본 사학의 명문인 와세다 대학에 다닐 무렵, 미국의 월가에서 금융공황이 발생했다. 증권 시세가 폭락하여 뉴욕의 아메리칸뱅크가 지불정지 사태에 빠지고, 은행 파산이 잇따랐다. 무려 1천300개의 은행이 이때 도산했다. 독일에서도 금융공황이 시작되었고, 오스트리아 중앙은행이 파산했으며, 영국의 잉글랜드은행도 지불정지 사태에 빠졌다.
일본은행도 파산위기에 몰렸다. 물가도 폭락해서 쌀, 생사 가격이 몇달 사이에 반값 이하로 떨어졌다. 그런데도 물건이 팔리지 않으니 공장에서는 직원들을 해고하거나 인원 정리에 나섰다. 급기야는 공장이 폐쇄되기 시작했고 수십만명의 실업자가 생겼다. 학생들은 좌익 운동에 빠져 연일 데모를 했다. 대학은 좌익과 반체제 운동의 본산으로 변질되어 갔다.
와세다대학의 교정에서는 연일 정부를 성토하는 집회가 열렸다. 조홍제, 이병철도 데모대 속에 섞여 거리로 뛰쳐 나갔다가 몇몇 학생들과 함께 연행되어 이틀 동안 경시청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조홍제, 이병철은 와세다 유학 시절 틈이 나면 일본의 공장을 방문해서 공업의 실상을 자주 살펴보았다. 이때 이미 두 사람은 기업가의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이런 인연으로 조홍제와 이병철은 훗날 마산양조장, 대구 삼성상회 시절에도 동업을 했고, 서울에 삼성그룹을 만들 때까지 동업하게 된다.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