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경남 밀양 수산제 역사공원, 연꽃·갈대 만발했던 삼한시대 저수지 폐허 딛고 역사공원으로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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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2-15 08:21  |  수정 2023-12-15 08:22  |  발행일 2023-12-15 제15면
못 둘레 20리…조선 고종때 제방 증축
일제강점기 거치며 파괴되거나 논으로
1986년 수문 발견 경남도기념물 지정
주변 정비 쉼터 조성…홍보관도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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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제 수문은 터널 모양이다. 자연 암반을 사람의 손으로 굴착해 만든 가장 원시적인 형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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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제 남쪽 수문은 용진강 강바닥에서 발견되었고 북쪽 수문지는 경작지에 매몰되어 있었다고 한다. 데크 너머로 보이는 건물이 홍보관이다.

자연스럽게 수문 가까이로 내려서는 산책 데크에서 오래된 수문의 안쪽에 고여 있는 물을 본다. 탁하고 걸다. 수문은 터널 모양이다. 자연 암반을 사람의 손으로 굴착해 만든 가장 원시적인 형태라고 한다. 검푸른 암반을 정으로 쪼아내는 사람들을 상상한다. 여기서 저기까지 깡, 깡, 깡, 쪼아 마침내 어둠을 꿰뚫는 빛의 다발을 느꼈을까. 긴 시간이 흘러 이제는 열고 닫는 문짝도 없고 조절해야 할 물도 없으니 그저 정물화된 터널이다. 햇빛에 익는 돌 내음과 고인 물의 서늘하고 축축한 파동 그리고 햇빛과 물기로 자라난 풀들이 회화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어딘가 먼 오아시스의 물가 같다.

◆하남읍 수산리 수산제

밀양 수산제는 삼한시대 때 만들어진 농사용 저수지다. 김제 벽골제, 제천 의림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저수지로 불리는 유명한 이름이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산제가 언급된다. '고려 김방경(金方慶) 장군이 농지에 물을 댈 수 있도록 제방을 쌓아 일본 정벌에 나서는 고려몽골연합군의 군량을 갖추었다.' 이후 '세종실록지리지'에 제방이 무너졌으나 고쳐 쌓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고, 세조 13년인 1467년에 체찰사 조석문이 밀양, 창녕, 청도, 창원, 대구, 현풍, 영산, 양산, 김해 등 9개 고을에서 장정을 동원하여 제방을 다시 수축하고 국둔전(國屯田)으로 삼았다고 한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국둔전은 군인이 경작해 그 수확물을 모두 군사비용으로 충당하는 밭이다. 국가의 농장이라는 뜻에서 국농소(國農所)라고도 했다.

하남읍은 밀양시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읍의 남쪽 경계에 낙동강 본류가 흐르고, 동쪽과 서쪽, 북쪽, 중앙부까지 지류가 흘러 범람원이 넓게 발달했다. 또한 하남읍은 조선시대 밀양에서 김해로 가는 교통의 요지로 양동역(良洞驛)과 수산진(守山津)이 있었다. 교통의 요지에 배후 습지가 넓었으니 국농소의 설치는 당연했겠다. 수산제의 제방은 낙동강의 물이 불어나 지류인 용진강(龍津江)을 타고 국둔전으로 범람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용진강은 지역민들이 '안강'이라고 불렀는데, 하남읍내의 동명중학교 즈음에서 수산제 수문을 지나 양동, 대사, 파서리를 통과하여 상남면 오산리로 흘러갔다. 큰 배가 돛을 달고 다닐 만큼 큰 강이었지만 지금은 없어지고 그 흔적이 부분적으로 남아 수로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수산제의 둘레는 20리다. 못 가운데에 죽도(竹島)가 있었고 세모마름과 마름, 연과 귀리가 멀리까지 가득했다고 한다. 저수지에서는 물고기도 잡고 연근(蓮根) 등을 채취했다. 조선 전기의 문신 권람(權擥)은 '수산제에는 연꽃이 피어나고 물고기와 자라가 떠서 헤엄치고, 죽도에는 대나무가 무성하다'고 했다. 임진왜란 이후 국농소는 휴한지가 되었고 수산제는 황무지가 되었다. 밀주지(密州誌)에 의하면 갈대와 연꽃만 만발했다고 한다. 그러다 고종 초에 수산제의 제방을 증축하고 다시 국둔전에 속하게 했다. 수산제는 황토로 된 제방이 일제 강점기 전까지 수산리에서 양동리에 걸쳐 약 1㎞ 정도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하남제방이 축조되고 새로운 수리시설이 생겨나면서 수산제는 논이 되거나 파괴되거나 묻혔다.

◆수산제 역사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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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마당에 '수산제 농경문화 축제' 때 주민들이 만든 볏짚 조형물들이 있다. 날씨 좋은 계절에는 소풍 나온 사람들로 가득하다고 한다.

1986년 11월24일, 수산제 수문이 발견되면서 수산제에 관한 연구가 시작됐다. 당시 '남쪽 수문은 용진강 강바닥에서 발견되었고 북쪽 수문지는 경작지에 매몰되어 있었다'고 한다. 발굴결과 수문은 응회암 자연 암반을 터널형식으로 굴착한 수로로 조성되어 있으며 폭이 약 1.58m, 높이 약 1.6m, 양 수문 간 길이는 19.6m 정도다. 나무로 만든 수문의 갑문은 소멸되어 구조와 형상을 알 수 없다. 수산제 수문은 1990년 12월20일 경남도기념물 제102호로 지정됐다.

2019년에는 수산제 수문 주변을 정비해 공원으로 조성했고 2022년에 홍보관을 세웠다. 홍보관에서는 밀양과 수산제 이야기, 수산제 수문의 역할, 수산제의 옛 모습과 밀양농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스크린 퍼즐과 VR 체험과 게임이 있고, 밀양을 대표하는 민속놀이를 모형으로 표현한 흥미로운 전시도 있다. 수산제 수문을 보여주는 영상이 있는데 실시간이라 조금 뜨끔하다. 수문 앞에서 저 까만 터널 속으로 모험을 떠나는 생각을 했는데 이곳에서 다 보고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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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제 역사공원 홍보관. 밀양과 수산제 이야기, 수산제 수문의 역할, 수산제의 옛 모습과 밀양농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다.

홍보관과 수문 사이로 천이 흐른다. 표기된 이름은 양동천이다. 양동마을 앞이어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수문의 동쪽 바로 지척에 걸쳐져 있는 다리가 안강교다. 양동천이 안강, 즉 용진강일 듯하다. 천변으로 둑길이 짧게 이어진다. 수양버들이 가슴 찡하게 머리를 숙이고 있다. 그 안쪽으로 작은 섬을 가진 연못이 펼쳐져 있다. 죽도가 있던 수산제 같다. 그리고 연못과 수문 공간을 감싸며 이야기 정원, 소풍마당, 버들쉼터, 경작 체험원, 유실수원, 내고향 정원, 죽림원, 숲속 놀이터 등이 조성되어 있다. 아담하여 거닐기에 좋고 넉넉하여 자주 멈추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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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관과 수문 사이로 양동천이 흐르고 천변으로 둑길이 짧게 이어진다. 일제 강점기 전까지 황토로 된 제방이 수산리에서 양동리에 걸쳐 약 1㎞ 정도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버들 쉼터 옆 작은 연못가에서 청룡과 황룡이 신나게 웃고 있다. 소풍마당에는 볏짚으로 만든 아주 커다란 황소와 쇠똥구리, 수탉 등이 서 있다. 지난가을 이곳에서 '수산제 농경문화 축제'가 열렸다고 한다. 추수를 마치고 서낭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초동면의 전통 '새터가을굿놀이'를 시작으로 경남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밀양백중놀이, 법흥상원놀이, 감내게줄당기기, 밀양농악정기공연, 탈곡기 체험, 떡메치기 등 다양한 행사가 있었다. 청룡과 황룡은 새터마을에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서낭기에 그려져 있는 용을 형상화한 것이다. 볏짚 조형물은 주민들의 작품이다. 황소와 농부는 신월마을에서 만들었다. 수탉과 개구리는 성만마을, 미끄럼틀과 움막은 수산마을, 쇠똥구리와 장수풍뎅이는 대곡마을 사람들의 솜씨다. 빈틈없는 솜씨다. 수탉에 올라타면 저만치 내달릴 것 같다. 이베리아 반도의 곡물 창고는 밤이면 걸어 다닌다는 전설이 있다. 아프리카의 창고들은 밤이면 춤을 춘단다. 밤이면, 청룡과 황룡과 황소와 쇠똥구리와 수탉이 춤을 출 것만 같다. 그러다 어느 날 저들이 모습을 감추면, 수산제 제방을 걸어, 걸어, 어딘가로 떠난 걸로 하자.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55번 대구부산고속도로 남밀양IC에서 내려 25번국도를 타고 진영, 수산 방향으로 간다. 수산교차로에서 창녕 방향으로 나가 온천로를 타고 약 250m 정도 가다 첫 번째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들어가면 된다. 입장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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