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아날로그' 일본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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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1-08 07:08  |  수정 2024-01-08 07:09  |  발행일 2024-01-08 제23면

과거 취재차 일본에 들렀을 때다. 첨단 경제대국의 일본인들이 카드보다 현금을 애용하는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신칸센 역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승객 상당수는 현금으로 열차표를 구입하고 있었다. 받은 현금을 절도있게 세는 역무원들의 모습이 이채로웠다. 가이드 얘기로는 요금 수납원 중엔 명문 도쿄대 출신도 있다고 한다. 그 일부는 지폐와 동전을 세는 데 매력을 느껴 역무원 직업을 택한 '오타쿠(특정 취미에 빠진 사람)'라고 한다.

한국에선 사라지고 있는 도장(圖章)도 일본에선 여전히 애용되고 있다. 관공서·기업에선 아직도 본인 확인 때 전자서명 대신 서류에 직접 도장을 찍어 제출한다. '날인(捺印)이 돼 있지 않으면 믿을 수 없고, 예의가 아니다'라는 인식이 뿌리내려져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공립 초·중학교에서 아직도 팩스를 사용하는 곳이 95.9%에 이르렀다. 교육당국이 비효율성을 이유로 2025년엔 모든 학교에서 팩스와 도장을 퇴출시키겠다고 했지만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일본은 왜 이토록 '아날로그'를 고집할까. 일본인 특유의 '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but Goodies·오래된 것이 좋아)' 정서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현금 선호의 경우 지진 등 잦은 자연재해에서 비롯된 생존 본능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날로그 문화와 관련해 현지에선 자성(自省)의 목소리가 없지 않다. 근데 바쁘고 삭막한 디지털 시대 속에서 아날로그를 고수하는 게 그리 반성해야 할 일인가. 외려 그런 모습이 시도 때도 없이 지진 피해를 겪으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일본을 지탱해 온 저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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