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켄 로치의 꽃다발

  • 이경란 소설가
  • |
  • 입력 2024-02-14 07:46  |  수정 2024-02-14 07:47  |  발행일 2024-02-14 제18면

2024021301000354400014171
이경란 (소설가)

켄 로치라는 거장을 만나러 갔다. 그동안 몇 번 가까운 영화관 시간표를 검색했었지만 아침 일찍 혹은 밤늦은 시각이라 여의치 않았다. 상영은 시쳇말로 끝물이었다. 켄 로치라는 이름이 생소한 분들을 위해 그의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미안해요, 리키'를 언급해야겠다. 섣부른 짐작이지만 감독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전작도 알 것이고, 모르는 사람은 전작도 모를 것이다. 아마도 영화 취향만을 반영하는 건 아닐 것이다.

변죽을 오래 울린 이유는 영화 '나의 올드 오크'를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아서이다. 영국 북동부의 쇠락한 탄광촌에 시리아 난민들이 들어온다. 마을 주민들은 그들의 생계만으로도 힘든 처지로 난민에게 공감하거나 연민할 여유가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자녀들도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 아버지의 사고사와 이후 균형 잃은 관계로 인해 아내와 아들을 놓친 중년남성 TJ와 난민 청년여성 야라의 우정과 연대가 결국 이 얼어붙은 관계에 균열을 내는 데에 성공한다. 협력자도 늘어난다. 그러나 쉽지 않다. 곳간이 넉넉하면 내 것을 지키느라 타인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법이고 곳간이 비면 나눠줄 게 없는 법이다. 하물며 역사와 문화가 전혀 다른 이들 사이에서는 더욱.

전작들에서 자본과 제도가 인간을 어떻게 소외시키는지, 사람이 희망이라면 그 희망이 실질적으로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다른 것을 보여주었다. 공감과 연민, 연대와 우정 같은 것들. 함께 밥을 먹으면 단단해진다는 믿음으로 공동체를 결속시키려 했던 시도가 혐오와 배척, 이기심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고, 절망적 상황이 회복될 길 없어 보이는 가운데 켄 로치는 희망의 꽃다발을 관객에게 날린다. 한두 개가 아닌 꽃다발 세례이다.

감옥에 갇혔던 야라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이웃들은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일을 한다. 꽃다발과 인형, 애도 카드 등을 든 주민들이 야라의 집 앞으로 몰려든 것이다. 물든 것일까. 아니면 마음 깊은 곳에 화석처럼 굳어 있던 인간애를 스스로 캐내고 발현한 것일까. 무엇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번 영화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영화 속 인물들과 그들을 창조해낸 감독에게 고마웠다. 현실에서 이기적이고 무력한 나 같은 사람은 정말 그랬다. 달달한 로맨스나 화끈한 액션도 좋지만 이런 영화가 이른 아침이나 심야로 밀려나지 않는 세상이기를. 돌아오는 길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순진하게도.

이경란<소설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