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울산 장생포 문화창고, 폐건물에 불어넣은 문화재생의 숨결…울산의 새로운 바다가 되다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
  • 입력 2024-03-15 08:01  |  수정 2024-03-15 08:02  |  발행일 2024-03-15 제15면
장생포의 한국공업화 역사 보존하고
울산 미래 문화가치 창출위해 만든 공간
1층 공연장·3층 전시장·6층엔 책공간
건물 뒤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바다
석유화학단지·공장들도 한 편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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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창작자들이 만든 '시민창의광장'. 2020 공공미술프로젝트를 통해 완성되었으며 88점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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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외벽에 푸른 고래가 헤엄치고 있다. 장생포로 들어서는 초입, 부드러운 고개를 넘어 급히 휘어지는 도로변이다. 턱을 치켜들면 길 건너 높은 축대 위에 장생포 초등학교가 올라앉아 있고 고개를 돌리면 바다에 늘어선 커다란 뱃머리의 둥근 코끝이 만져질 듯 가깝다. 그들 뒤로 연기를 내뿜는 석유화학단지와 각종 공장, 다채로운 항만 시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이 자리에서 1962년 울산공업센터 특정공업지구 기공식이 열렸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작이었고 대한민국 산업수도 울산의 시작이었다. 그 후 이 자리에 1973년 냉동 창고가 들어섰다. 처음에는 양고기를 가공하던 남양냉동이었다. 1993년에는 명태, 복어, 킹크랩을 가공하는 세창냉동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0년도 채 안 돼 경영악화로 문을 닫았고 건물은 폐허가 된 채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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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티 공간인 입구는 '청춘마당'이라 불리며 종종 버스킹 공연이 열린다. 고래 조형물 뒤로 바다가 바짝 다가와 있다.

◆냉동창고에서 문화창고로

푸른 고래 옆에 '제19회 대한민국 지방자치경영대전 문화관광분야 최우수상'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또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지역명소'라는 걸개도 보인다. 냉동 창고는 2021년 복합 문화예술 공간인 '장생포 문화창고'로 변신했다.

건물 매입 후 공식 개관까지 약 5년이 걸릴 만큼 많은 공을 들였다. 건축공간재생 분야의 전문컨설턴트, 문화예술단체, 대학생과 주민 등 100여 명이 폐산업시설의 문화재생에 대한 정보를 나눴고 새로운 예술 공간 조성을 위해 수차례 모임을 가졌으며 3번의 공간 실험을 거쳤다. '장생포 문화창고'는 장생포가 간직한 한국공업화 역사의 가치를 보존하고, 문화 인프라가 부족했던 울산 남구의 미래 문화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새로운 문화의 보물창고'라는 의미다.

입구는 기둥으로 둘러싸인 열린 공간이다. 고래 조형물 뒤로 바다가 바짝 다가와 있다. 저렇게 큰 배가 이렇게 바짝 접안되어 있다는 건 바닷속이 얼마나 깊은 벼랑이라는 뜻일까. 입구는 '청춘마당'이라 불리며 종종 버스킹 공연이 열린다. 1층 로비에 들어서면 커다란 통 창 너머로 장생포 바다가 펼쳐진다. 맞은편에는 음식을 먹으며 쉴 수 있는 푸드코트 '어울림마당'이 자리하고 있다.

2층에는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기념관이 있다. 울산의 공업지구 지정 이후 오늘에 이르는 역사와 변화 과정이 소품, 사진 자료, 그림 등 다양한 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맞은편에는 체험공간이 자리한다. 그리고 만들고, 쓰고, 몸으로 표현하는 등 유아부터 성인까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3층은 갤러리B와 미디어아트 전시장으로 구성돼 있다. 전체 층 가운데 과거 냉동창고의 모습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곳이다. 4층에는 갤러리C와 울산의 창작자들이 만든 '시민창의광장'이 있다. 2020 공공미술프로젝트를 통해 완성한 '시민창의광장'은 공간 전체가 바닷속 것 같다. 입체작품 18점, 평면작품 62점, 영상작품 6편, 공간구성 2식 포함 88점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개 울산 도시와 고래에 관한 것이다.

작품 중 하나인 '빛의 방'은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빛 그리고 그 속에 한 점 빛으로 존재하는 '나'를 느낄 수 있는 방이다. 5층은 창작자들을 위한 공간이다. 남구구립교향악단의 전용 연습실이 있고, 공유 작업실과 연습실, 녹음실, 회의실 등이 있다. 전 층의 중앙에 통 창을 가진 홀이 있다. 각 층에 들어설 때마다 가장 먼저 장생포를 만난다.

◆멈추어 바라본다, 지관서가

6층에는 각종 공연과 상영회, 강연 등이 가능한 '소극장 W'와 서점 겸 카페인 '지관서가(止觀書架)'가 들어서 있다. 입구에 이런 문구가 있다. "도심 속 현대인의 분주한 일상에 성찰의 피난처로써 책을 통한 '사유'와 '대화' 그리고 '문화'의 경험의 장을 마련하여 우리의 삶에 참 쉼과 성장, 행복을 찾고 나누는 공간으로서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지관서가입니다."

지관서가는 울산에서 오랫동안 석유화학공장을 운영해 온 <주>SK의 재원을 기반으로 인문학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가 기획하고 지방자치단체가 공공 공간을 제공해 만들어진 복합 인문 문화공간이다. 스르륵 유리문이 열리자 커피 향이 훅 풍겨온다. 눈길 가닿는 곳마다 책이고, 장생포고, 고요한 사람들이다. 지관서가는 평일, 휴일 가릴 것 없이 인기가 많다고 한다. 이곳에서 강연회가 열리고 북 토크와 음악회도 열린다.

현재 울산에는 6곳에 지관서가가 있는데 각각 다른 주제들로 책을 선정하고 공간을 구성했다. 울산대공원은 '관계', 장생포는 '일', 남구의 선암호수공원은 '나이 듦', 울주의 유니스트는 '명상', 울산시립미술관은 '아름다움', 북구의 박상진호수공원은 '영감'을 주제로 한다. 2026년까지 울산에 스무 곳의 지관서가가 들어설 계획이라 한다. 또한 울산 외에도 여러 지역에 지관서가를 열 예정이라고 한다. 묵직한 커피잔을 들고 장생포를 본다. 배들과 굴뚝들과 하얗게 피어오르는 연기, 웅장하다. 편안한 차림의 연인이 나란히 책 앞에 앉는다. '지관(止觀)'은 멈추어서 바라보는 일을 뜻한다. 문득 전깃줄에 빼곡히 앉아 날개 쉼 하는 새들이 떠오른다.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책시렁에 앉아 날개 쉼 하는 새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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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공공미술프로젝트 작품 중 하나인 '빛의 방'.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빛을 주제로 한다.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별빛마당

6층까지는 엘리베이터가 운영되지만 옥상으로 가는 길은 계단이다. 계단실의 문을 열면, 파란 동화나라로 들어선 듯하다. 피아노 건반 모양의 계단이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하고 말을 건다. 계단을 밟으면 '도도 솔솔 라라 솔' 피아노 소리가 나고, 벽면의 노란 별 음표가 반짝 빛을 낸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에서도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노래를 흥얼거리며 옥상 문을 연다. 와락 하늘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유리 벽을 가진 옥탑방이다. 큼직한 테이블과 의자들이 가지런히 창밖을 내다본다. 한쪽 벽은 장생포 문화창고를 방문했던 사람들의 작품으로 가득하다. 하나하나 개성이 넘친다. 새로운 장소에서 즐거운 경험을 한 이들의 '신남'이 느껴진다.

유리문을 열고 옥상으로 나간다. 옥상정원은 '별빛마당'이다. 귀여운 천국의 계단이 하늘을 담고 있다. 물멍을 한다. 배멍을 하고, 굴뚝멍을 하고, 연기멍을 하고, 하늘멍을 한다. 새처럼, 지관 한다. 작은 배들이 빠르게 오가고 커다란 배가 천천히 지나간다. 입출항하는 배들의 종류가 워낙 다양해서 원활한 흐름을 위해 속력 규정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멈추어야 보이는 것들 앞에서 속도를 생각한다. 현재 장생포 문화창고는 고래문화재단이 위탁운영 중이다. 2012년 창립된 고래문화재단은 울산 최초 기초 지역문화재단이다. 울산고래축제와 고래문화마을, 남구거리음악회 등 고래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분야에서 문화예술의 일상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대구에서 경주 방향 경부고속도로로 가다 경주 지나 언양분기점에서 부산, 울산 고속도로 울산 방면으로 간다. 울산 톨게이트로 나와 울산항 방향으로 가다 신여천 사거리에서 우회전해 장생포로를 따라가다 매암사거리에서 우회전해 장생포고래로를 따라 가면 어린이보호구역이 시작되고 바다가 처음 보이는 자리에 장생포 문화창고가 자리한다. 이용시간은 오전 10시부터 밤 9시까지며 매주 월요일은 쉰다. 주차와 입장은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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