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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수도원 예배당 중앙 제단의 테레사 수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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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테레사 수도원. 아빌라는 성벽만큼이나 단단한 종교도시이다. |
이 수도원에는 특별한 성물이 있다. 유리 구체에 담겨있는 성 판탈레온(Saint Pantaleon)의 피이다. 성 판탈레온을 기리는 축제(매년 7월27일) 전날 밤이면, 이 피가 기적적으로 액화된다고 한다. 액화되지 않으면 재앙이 닥친단다. 믿기 힘든 이 전설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매년 이 기적을 보기 위해 수천 명의 신자들이 수도원으로 모여든다.
16세기 가톨릭 자발적 혁신을 주도한 인물
'맨발의 가르멜회' 창립 후 곳곳 수도원 세워
생가와 유년시절 보낸 정원은 성지순례지로
성 판탈레온은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했다. 그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황제의 주치의가 된 의사였다. 후에 가톨릭에 귀의하여 인술을 행하며 존경을 받았다. 아버지가 죽은 후 엄청난 유산을 받았지만, 노예를 풀어주고 재산은 모두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했다. 이 때문에 그의 명망이 높아지자 그만큼 동료 의사들의 시기 질투도 커졌고, 마침내 그가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을 밀고했다. 황제는 그를 살려주려 했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구세주라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치료의 기적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이 황제에게는 마술로 간주되었고 결국 처형당한다. 그는 순교할 때도 잘린 목에서 흰색의 피가 솟구치는 기적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성 판탈레온의 형상은 약상자와 약 수저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짐작하듯이 그는 사람들에게 치료의 신 혹은 의사의 수호성인으로 받들어졌다. 약병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불 같은 존재라 할 것이다. 인간이 극복하기 가장 힘든 것 가운데 하나가 질병일 것이다. 질병의 고통을 치료하는 이적은 어느 종교에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성 판탈레온은 순례자들 사이에서 경배의 대상이었던 만큼 그의 유물도 여러 곳에 흩어지게 됐다. 성 판탈레온의 피가 아빌라의 강생수도원에 소장된 것 역시 이 도시의 종교적 전통과 깊은 신앙심의 결과라 할 것이다. 성인의 피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그 신앙의 증거로서 신자들에게 축복과 영적인 의식의 의미를 더하는 요소이다. 테레사에게 주어진 첫 번째 소임이 중병에 걸린 병자들을 간호하는 것이었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테레사는 1515년 아빌라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구시가의 남쪽 성벽에는 1636년에 건축된 테레사 성녀 수도원(Convento de Santa Teresa)이 있다. 수도원의 작은 예배당에는 기도하는 테레사의 조각상과 성화가 장식되어 있다. 스테인드글라스에는 테레사의 행적에 관한 두 가지 인상적인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하나는 동생 로드리고와 이교도 땅으로 전도하러 가는 모습이고, 또 하나는 강생수도원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다. 환몽 중에 계단에서 예수님을 만나 "당신은 누구신가요?"하고 묻자 예수님은 "나는 테레사의 예수이다"라고 답했고, 테레사는 "저도 예수님의 테레사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로 인해 테레사는 '예수의 테레사(Santa Teresa de Jesus)'로 불리게 됐다. 이외에도 기도 중 천사가 나타나 불로 만든 창으로 가슴을 찔러 성흔이 생겼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예배당 제단의 왼쪽 방은 테레사가 탄생한 곳으로, 작고 화려한 방에서는 16~17세기에 활동한 스페인의 유명 조각가 그레고리오 페르난데스가 만든 성녀 조각상을 볼 수 있다. 방 옆의 '성녀 테레사의 정원'은 테레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임을 상징하는 어린 테레사의 동상이 있다. 예배당 입구 오른쪽의 작은 박물관에는 반지를 낀 테레사의 손가락 유해가 전시되어 있다. 이 수도원 역시 테레사로 인해 가톨릭 신자들의 중요한 성지순례 코스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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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과 구시가지. 중세 시대의 성벽이 구시가지를 감싸고 있다. |
그녀의 고군분투에도 개혁은 녹록지 않았다. 1575년부터 가르멜회 내에서 개혁파와 보수파 간 분쟁이 시작됐다. 수녀들이 파문당하는 등 맨발의 가르멜회에 대한 온갖 박해도 뒤따랐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그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 1579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맨발의 가르멜회를 가르멜회에서 분리해 독립 수도회로 인정했다.
테레사와 수도원 개혁 앞장선 '십자가의 요한'
환시 경험 후 그렸던 '십자고상'은 성물로 보관
영성 입힌 신비주의 작품 佛상징주의에 큰 영향
그녀는 1582년 66세의 나이로 아빌라 서쪽 90Km쯤 떨어진 알바데토르메스(Alba de Tormes)에서 선종했다. 선종 후 며칠 동안 이 도시에는 향기가 그윽했는데, 그 진원지는 바로 그녀의 무덤이었다. 후에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살라망카대 교수들이 무덤을 다시 열었다. 매장한 지 수 개월이 지나 관의 나무와 옷은 모두 부패했지만 시신은 그대로였다. 검사 결과 별다른 방부 처리도 되어있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은 테레사 수녀가 기적을 일으켰다고 여겼고, 교황청에서도 이를 공식인정했다.
후에 탄생지 아빌라와 사망지 알바데토르메스 사이에 유해를 차지하려는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 그녀의 검지 유해만 아빌라의 이곳에 소장하게 됐다. 그 외 유해는 알바데토르메스의 성녀 대테레사 성당에 소장됐다. 팔과 심장은 유리관에 담겼고, 손은 보석을 장식한 청동 장갑에 싸여 전시되고 있다. 그런데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단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시랍화 현상'으로 설명한다. 스페인의 지중해성 기후가 시신의 부패를 막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학적 사실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신성성을 부여받으며, 수많은 신도가 이곳을 찾는다. 테레사는 1662년에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1970년 여성 최초의 교회박사로 포고됐다.
테레사와 함께 수도원 개혁에 빼놓을 수 없는 성인이 '십자가의 요한'이다. 그는 1542년 아빌라 지역의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으며, 살라망카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가 가르멜회에 입회한 1563년은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로 막 사제가 되었을 때였다. 테레사가 수도원 개혁을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그는 테레사와 함께 당시 교회의 부패와 쇠퇴를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성 요한 역시 강생수도원에서 특이한 경험을 했다. 평소처럼 기도를 올리고 있던 어느 날, 그의 앞에 있던 십자고상(十字苦像)의 예수가 갑자기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매우 놀랐지만 큰 은총을 느끼며 '주님을 위해 고통과 경멸을 받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렇게 환시를 체험한 요한은 이후 표현할 수 없는 황홀감에 빠졌고, 그 느낌으로 십자고상을 그렸다. 현재 그의 그림은 강생수도원의 성물로 보관되어 있다. 살바도르 달리의 걸작 '십자가 성 요한의 그리스도'는 이 그림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성 요한은 근대 초 가톨릭 영성 신학의 거장이자,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감각으로 신비주의적 시를 쓰는 시인이기도 했다. 성녀 테레사가 주로 대중적인 산문 형식으로 영성을 표현했다면, 성 요한은 시로써 영성을 가미한 신비주의적 작품을 남겼다. 그가 이룩한 시적 전통은 스페인의 현대 시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고, 프랑스의 상징주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성 요한은 1591년 우베다에서 선종했고, 1726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1926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교회박사로 포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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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페르난도 2세가 이 건물에서 여름을 나기도 했으며, 스무 살로 요절한 그의 외아들 후안 왕자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에스파냐 최초의 종교재판소장이자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 토마스 데 토르케마다도 이곳에 묻혔다. 이처럼 아빌라는 성벽만큼이나 단단한 종교도시이다.
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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