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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동부지역본부 차장 |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1950년부터 2010년까지를 관통하며 제주에서 태어난 오애순과 양관식의 일생을 사계절로 풀어낸 대서사시다. 제목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어로 '무척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 살아내느라 수고한 당신의 인생, 그리하여 버텨줘서 고맙다는 역설적 찬사다.
이 드라마는 주인공 애순의 일생을 통해 한 가족, 나아가 한국 근현대사 전체를 섬세하고 유려하게 직조한다. 제주의 바람, 초가의 기억, 사라진 연인의 이름처럼 문학적 정서가 강하게 배어 있으며, 죽음과 이별,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이 던지는 무심한 위로는 곧 우리의 이야기다. 아이유가 연기한 젊은 애순과 금명은 세대의 차이를 넘어선 연속성과 단절을 모두 보여주며, '우리 엄마'와 '나'를 하나로 꿰어낸다.
이러한 서사는 이탈리아 영화 <시네마천국>을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 살바토레는 고향의 멘토 알프레도의 죽음 소식을 듣고, 잊고 있던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알프레도가 남긴 필름 속 키스 장면들은, 삭제됐던 삶의 조각들이 어떻게 한 사람의 영혼을 지켜왔는지를 보여준다. 시네마 천국이 성장과 상실, 재회를 이야기했다면, 이 드라마는 '매우 수고했습니다'라는 말로 과거를 견뎌낸 모든 이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드라마의 진가는 '세대'에 대한 시선에서 더욱 빛난다. 관식이 아들에게 "공수가 바뀐 것 같지?"라고 말하자, 관식의 엄마 계옥이 또다시 그를 바라본다. 시간은 세대를 덧씌우고, 그 세대는 다시 다음을 품는다. 그렇게 삶은 꿋꿋이 계승된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사랑의 언어는 닮아간다. "당신 덕에 나 인생이 만날 봄이었습니다." 이 한 줄로 드라마는 가족, 연인, 시대를 아우른다.
드라마의 백미는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데 있지 않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관식과 애순이 손을 놓지 않고 서로를 지켜왔는지를 보여준다. 그 끈질긴 연대야말로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인간 삶의 본질과 사랑은 변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메시지다.
지금 대한민국은 위기 속에 놓여 있다. 대통령 탄핵 사태와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전쟁으로 정치·경제 양면에서 큰 혼란을 겪고 있다. 민심은 이념에 따라 양분됐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드라마는 말한다. 극 중 에세이 좋은생각에 실린 애순의 시에서 "당신 없어도 계신 줄 압니다". 이별의 아픔을 감싸는 문장이자,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따뜻한 격려다. 과거를 잃지 않되, 그에 매몰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다시 봄을 만날 수 있다.
"이제는 내게도 아랫목이 있어, 당신 생각만으로도 온 마음이 데워지는 걸"이라는 시구(詩句)는 단지 한 사람을 향한 그리움을 넘어, 시대의 체온을 회복하려는 바람이다. 우리는 이 시의 마지막 시구를 곱씹어야 한다. "아꼬운 당신, 폭싹 속았수다." 말없는 어른들이 걸어온 침묵의 역사에 고개를 숙이는 이 한마디가 지금의 고단함에 주는 위로이자 격려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애순과 관식이 서로를 지켜낸 것처럼, 우리 역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잃어버린 공동체성, 단절된 세대, 서로를 향한 존중과 연민. 그것들을 다시 불러내고 잇는 것, 그게 바로 드라마가 우리에게 남긴 과제다. <폭싹 속았수다>는 더 이상 어머니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힘든 나날의 연속이지만, 동시에 살아냈기에 더욱 의미 있는 고백이다.
눈물은 많되 원망은 없고, 고단하되 부끄럽지 않은 그 길. 다시 오는 봄까지, 봄인 듯 살기를 바란다. 모든 애순과 관식들에게, 폭싹 속았수다.
김기태 동부지역본부 차장
김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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