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시장 거사 참석 포항교회 장로
포항 돌아와 비밀리에 준비 중 체포
자발적 모인 군중들 등불들고 함성
대전리·청하·흥해로 퍼진 만세시위
세계 언론 '조선 독립 선언' 의지 보도
3·1운동 시위 참가 연인원 2900명
청년회 등 조직…항일 운동 불 지펴
1919년 3월 1일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에 저항한 대한민국의 독립선언이었다. 그로부터 만세의 함성은 수개월에 걸쳐 한반도 전역과 세계각지의 한인 밀집 지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남녀노소, 직업, 종교, 지역에 관계없이 일어난 시민 다수의 자발적 봉기였다. '대한민국' 연호는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을 원년으로 삼는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3·1 운동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대한민국을 지켜온 동해의 붉은 혼]4. 3·1운동 경북 최초의 발상지, 포항](https://www.yeongnam.com/mnt/file_m/202505/news-p.v1.20250501.a267ee64d0a74d73bfb606603980e146_P1.jpg)
포항 옛 여천장터. 포항 여천시장 3.1운동은 경북 최초의 만세운동이었고, 만세운동이 포항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도화선이 되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경북 3.1운동의 효시가 된 중앙동 여천시장 만세운동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기독교계 인사들과 학생들을 포함한 1천여 명 군중의 함성이었다. 군중이 시위대를 형성하여 서문시장을 나서자 일제 군경은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하고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했다. 그 현장에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 장로인 최경성과 송문수가 있었다. 최경성 장로는 현장에서 일제 군경에 체포, 구속됐고 송문수 장로는 포항으로 피신했다.
포항으로 돌아온 송문수 장로는 포항교회에서 운영하던 영흥학교 교사 장운한, 교인 이봉학과 이기춘 등에게 대구의 3·1운동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3월 11일 장날을 기해 여천시장에서 만세운동을 거행하기로 계획, 비밀리에 제반 준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거사 전 계획이 탄로 나고 만다. 주동자 4인은 체포되었고 독립선언서 등의 인쇄물은 전부 압수당했다.
그러나 장날인 11일, 여천시장에는 수백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주동자들의 체포사실이 알려지면서 자발적으로 모여든 것이었다. 그들은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일제가 총부리를 들이대며 강제해산 시키기까지 수 시간 동안 만세운동을 계속했다. 만세운동은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포항교회 신도 수백 명이 교회에 모였다가 시가지로 나와 등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자 군중들이 합세해 그 규모만 1천여 명에 달했다.
당시 여천시장 일대에는 일본의 주요 행정기관과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위치해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의 안전을 위해 포항헌병분견소를 설치하고, 집중 관리했다. 그만큼 일본의 경계가 다른 곳에 비해 삼엄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길에서 독립을 외치며 한발 한발 내딛는 행진은 목숨을 건 일이었다.
1919년 3월 15일자 매일신보는 포항의 3·1운동에 대해 '11일부터 12일에 이르기까지 형세가 불안하고 지금도 소요가 일어날 염려가 있으므로 경찰서원과 헌병이 출동해 해산케 하고 10일 오후 12시 북본정 예수교 학교(영흥학교)에 60여명이(중략) 학교 서편 언덕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후략)"라는 내용의 기사로 포항의 소식을 전했다. 포항 여천시장 3·1운동은 경북 최초의 만세운동이었고, 만세운동이 포항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도화선이 되었다.
![[대한민국을 지켜온 동해의 붉은 혼]4. 3·1운동 경북 최초의 발상지, 포항](https://www.yeongnam.com/mnt/file_m/202505/news-p.v1.20250501.15cd4a8933f9413e9649bad6bff3f778_P1.jpg)
포항 대전 3·1의거 기념관. 기념관 안에는 3·1운동 당시 의사들의 유품과 판결문, 훈장, 영정 등 관련 유물 18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실외에는 이준석 의사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고 애국 청장년들이 숙의를 하는 모습과 태극기 제작 모습이 재현돼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포항 곳곳으로 퍼져나간 만세의 함성
여천시장 만세운동은 이후 북구 송라와 청하로 이어져 송라면 대전교회 신자인 윤영복과 오용간, 윤영만 등 대전리 14인과 청하면 9인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계획한다. 그들은 교회당과 오용간의 집에서 밀회를 거듭하면서 거사를 의논하고 동지들을 규합해 3월 22일 청하장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당일 윤영만은 청하시장으로 향하다가 일경의 불시검문에 체포되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태극기를 몰래 감추고 청하 덕성리 청하장터에 모였다. 1시 반쯤 윤영복은 큰 태극기를, 오용간과 다른 동지들은 작은 태극기를 높이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장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들이 합세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청하면 일대는 만세소리로 진동했다. 일제는 총검으로 무자비하게 위협하며 군중들을 해산시키고 주동자 23인을 검거했다.
이에 대전리 주민들은 다시 만세운동을 계획한다. 교회당과 그 이웃 초가집을 주요 모임장소로 삼고 태극기 제작에 들어갔다. 그리고 5일후인 3월 27일 대전리 마을 앞 두곡숲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어린아이들도 골목에서 만세놀이를 했다. 일제의 감시는 더욱더 살벌해졌고, 당시 80여 호를 이루었던 마을은 50여 호로 줄었다.
4월 1일에는 연일읍내에서 수백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그날 밤 동해에서 수백 명이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오천, 대송, 달전 등 각 면에서도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다음날인 4월 2일에는 기계면 뒷산에 봉화가 오르면서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죽장, 신광, 청하, 송라, 흥해 등으로 확산됐다.
![[대한민국을 지켜온 동해의 붉은 혼]4. 3·1운동 경북 최초의 발상지, 포항](https://www.yeongnam.com/mnt/file_m/202505/news-p.v1.20250501.5ac520c76029421d99fca7a3041fc904_P1.jpg)
포항소망교회는 옛 포항교회 건물로 한국기독교사적 제3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입구에 '경북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이 일어난 곳'이라 새긴 커다란 표지석이 서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독립을 위한 한국의 3·1 만세운동 소식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뉴욕타임즈'는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알려진 것 이상으로 3·1 운동이 널리 퍼져나갔으며, 수천여 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그 외에도 AP통신, 샌프란시스코의 '이그재미너', 파리의 '앙탕트', 런던의 '모닝 포스트', 상해의 '민국일보'에서도 3·1 운동을 다루었다.
대한제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활약상을 취재해 글과 사진으로 남겼던 영국인 맥켄지는 일제강점기의 한국을 다시 방문해 1919년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던 3·1운동을 목격했다. 그리고 1920년 '한국의 독립운동(Korea's Fight for Freedom)'을 출간하여 일제의 만행과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그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문명에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 이를테면 자유, 자유로운 신앙, 그들의 여성의 명예, 그리고 그들 자신의 영혼의 계발과 같은 것들을 누린 적이 있으며 지금도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나는 지금 '자유'와 '정의'를 외치고 있다. 세계는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가?'
![[대한민국을 지켜온 동해의 붉은 혼]4. 3·1운동 경북 최초의 발상지, 포항](https://www.yeongnam.com/mnt/file_m/202505/news-p.v1.20250501.dd13a7e85c4f4a679cdcc1a9855f4a49_P1.jpg)
포항 대전 3·1의거 기념지. 대전리 대전교회는 '사적 제45호 대전교회 3·1의거 기념지 및 유물 제5호 대전교회 영일 3·1 동지사'로 지정돼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만세운동 이후
1920년대에 발간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포항의 3·1운동 시위횟수는 9회, 참가 연인원은 2천900명, 사망자 40명, 부상자380명, 피검자 320명이다. 옥고를 마친 의사들은 이후 청년회 등을 조직해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과 자주독립정신을 불어 넣었고 야학이나 물산장려운동, 신사참배 반대, 일본상품 불매운동, 일본인 교장추방 등의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혹독한 고문으로 순국한 분들도 있으며 윤영복과 윤영만, 이준업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고 전한다. 3·1운동은 일본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막을 내렸지만 우리민족의 저력을 세계만방에 보여 주었던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독립국가 수립 과정의 출발이었다.
여천시장 만세운동의 현장은 오늘날 포항소망교회에서 꿈틀로와 육거리로 이어지는 일대다. 포항소망교회는 옛 포항교회 건물로 한국기독교사적 제3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입구에 '경북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이 일어난 곳'이라 새긴 커다란 표지석이 서 있다.
여천시장 만세운동의 큰 축이었던 영흥학교는 학교명을 바꾸지 않고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는 등 조선 황민화 정책을 거부하여 일제로부터 끊임없는 핍박과 탄압을 받았고 한때 폐교 위기에 내몰리기도 했지만 백년이 넘은 지금도 건재하다.
![[대한민국을 지켜온 동해의 붉은 혼]4. 3·1운동 경북 최초의 발상지, 포항](https://www.yeongnam.com/mnt/file_m/202505/news-p.v1.20250501.f52ffbaa19774f67852a2bd122b6795c_P1.jpg)
포항 대전 3·1의거기념비. 송라면 대전리는 '3·1 만세촌' 또는 '만세마을'로 불린다. 마을 입구 두곡숲에는 '3·1 의거 기념비'가 있고, 의거 당시 태극기를 제작했던 자리에는 '대전 3·1의거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송라면 대전리는 지금도 '3·1 만세촌' 또는 '만세마을'로 불린다. 전체가 80여 가구인 한 마을에서 14인의 3·1의사가 난 곳은 전국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정부에서도 14인 의사들의 건국 공로를 인정해 훈장과 포장, 대통령 표창을 내리기도 했다.
대전리 대전교회는 '사적 제45호 대전교회 3·1의거 기념지 및 유물 제5호 대전교회 영일 3·1 동지사'로 지정돼 있다. 마을 입구 두곡숲에는 '3·1 의거 기념비'가 있고, 의거 당시 태극기를 제작했던 자리에는 '대전 3·1의거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기념관 안에는 3·1운동 당시 의사들의 유품과 판결문, 훈장, 영정 등 관련 유물 18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실외에는 이준석 의사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고 애국 청장년들이 숙의를 하는 모습과 태극기 제작 모습이 재현돼 있다. 오늘날 대전리 만세촌에서는 매년 3월 1일마다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진다. 대한독립만세.
▨참고문헌=포항시사. 포항의 3.1운동사. 경북독립운동사. 한국학중앙연구원.
글=류헤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포항시]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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