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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숙 산학연구원 기획실장 |
놀람보다 걱정이 앞섰던 아버지의 한마디였다.
친정집 거실 장식장에는 빛바랜 전집처럼 두툼한 족보가 있다. 계보는 촘촘했지만, 내 자리는 쉽게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이 곁에 계신 지금이 아니면, 족보와 마주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종친회 사무국장직을 조심스럽게 수락했다. 이름으로만 존재하던 족보의 세계에 나도 한 발을 내디뎠다. 그것은 단순한 혈연의 목록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오래된 거울이었다. 그 여백에 이제는 나의 목소리를 새기고 싶었다.
임원 회의가 열린 지난 2월, 어르신들의 이야기 속에서 자주 언급된 인물이 있었다. 바로 효절공 농암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선생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 문학의 대가인 농암의 '효' 정신은 후손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농암은 1512년(중종 7년), 부모 곁을 지키고자 고향 안동 분강(汾江) 기슭에 정자를 지었다. '애일당(愛日堂)'이라 이름 붙인 이곳은, '부모가 살아계신 하루하루를 아끼고 사랑하겠다'는 다짐이 깃든 공간이었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예를 다했고, 명절이면 고운 때때옷을 차려입고 부모 앞에서 춤을 추었다. 부모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루는 그에게 가장 귀한 시간이었다.
농암의 효심은 가족 안에 머물지 않았다. 고령의 마을 어르신들을 정기적으로 초청해 연회를 열었고, 그 모임은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로 불렸다. 무려 14년간 이어진 이 모임은 '함께 공경해야 진정한 효'라는 농암의 생각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효는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공동체로 퍼져나간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그 정신이 깃든 공간, 애일당은 시대의 풍파 속에서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일제강점기 도로 개설로 처음 자리를 옮겼고, 1975년 안동댐 건설로 또다시 이전의 운명을 맞았다. 그리고 2005년, 도산면 가송리 농암종택 내에 복원되며 마침내 제자리를 되찾았다. 1971년 경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이 공간은, 농암 선생의 삶과 정신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나는 오는 5월24일, 종친회 어르신들과 선조 유적지를 순례할 예정이다. 첫 행선지는 이순몽 장군의 고택인 영천 성내동 숭렬당(崇烈堂)이다.
'나는 누구의 후손인가.'
이 질문은 곧,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망설였던 종친회 사무국장직을 수락한 것도, 그 물음에 대한 나의 응답이었다.
그런 다짐을 품고 있던 어느 날, 한 어르신이 종친회 뱃지를 조심스레 건네며 말씀하셨다.
"너도 이제 어엿한 종친이다."
그 한마디는 종친회에서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따뜻한 환대였다. 남성 중심의 족보와 종친 문화에서 느껴왔던 거리감은, 그 뱃지 하나로 자연스레 허물어졌다. 누군가에겐 익숙했던 족보가, 나에겐 돌아 돌아 비로소 소중한 의미로 다가왔다. 사무국장직을 맡으면서, 선조의 삶을 오늘에 이어야 한다는 자각이 생겼고, 애일당의 정신은 날마다 그에 대한 실천을 되묻게 한다.
이제는 머물던 자리를 넘어, 여성들도 주체로 나설 때다. 족보는 과거의 기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계보의 여백에 침묵이 아니라 책임을 새기고, 여성 종친의 목소리가 더욱 힘있게 이어지기를 바란다.
이향숙 산학연구원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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