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근자 소설가
항상 맨 처음의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일 것이다. 이 질문을 필자 개인에게 포커스를 맞추면 '왜 소설을 쓰는가'이다. 등단한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나는 가끔 이에 답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컴컴한 밤길 저 멀리에서 깜빡이는 불빛을 보는 것 같은 아득한 느낌에 사로잡힐 뿐 선명하게 답하기 어렵다. 답답하다.
그런데 이건 조금 알 것 같다. 앞으로 두 달 동안, 영남일보에서 제공하는 지면인 문화로(路)를 산책하는 일이, 이 근원적인 최초의 질문에 대한 아주 소박하면서 부분적인 내 대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큰 소망을 품고 첫발을 내디딜까 한다.
그러니까 도대체 '내'가 뭐라는 말인가. 자아라는 개념은 수많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필자는 페르소나라는 요즘 유행하는 단어에 초점을 맞출까 한다. 정신의학자 칼 융은 말했다. 페르소나 즉 "사회적인 성격은 그가 속한 사회의 기대에 맞춰지거나, 개인의 사회적 목적과 열망에 의해 형성된다"라고. 모든 사람은 울창하고 깊은 자아 안에 천 개의 페르소나를 지니고 있단다.
그렇다면 멀티 페르소나의 소유주라는 현대인은 무엇을 위해 여러 군데의 부계정을 만들어 활동하는 걸까. 마크 저커버그가 진단했다. "SNS가 연결보다는, 스스로를 자유롭게 표현하여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사적인 공간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말 그런가. 그렇다면 이로 인해 얻는 가장 큰 이익이 뭘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을 생각하자 답을 알 듯도 하다.
가령 이런 것이다. 오늘 아침에 나는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향했다. 늘 집에서 글을 썼는데, 습관을 바꾸기로 마음먹은 지 여섯 달이나 지나서 실행에 옮기기로 한 날인 것이다. 무거운 노트북을 든 채 다른 손에는 자두를 들었다. 카페에 가기 전에 이웃에 사는 엄마께 들르기로 했다. 100여 미터나 걸었을까. 땀이 옷을 흠뻑 적셨다. 그때였다. 카페에 가기 싫은 이유 여러 개가 동시에 안개처럼 하얗게 피어올라 짙어지더니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나는 후회하는 대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내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운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오늘 어쨌든 한 발자국 나섰잖아,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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