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유미 작전명이유 대표
무언가를 불편하게 느낀다는 건, 그 안에 관심과 질문이 담겨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오랫동안 '택호'라는 말을 그리 반갑게 여기지 않았다. '양산댁' '안동댁'처럼 이름 뒤에 붙는 '댁'이라는 호칭이 여성의 고유한 이름을 지워버리고, 집안이나 출신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특히 경상도 사투리 특유의 억양이 더해지면 '~댁'이라는 말이 마치 사람을 낮춰 부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기산면 죽전2리에서 들은 한 마을 이야기가 내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이 마을에는 귀촌 여성들에게 '택호'를 지어주는 전통이 있다. 처음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마을 활동가인 영자씨를 딸처럼 "영자야~"하고 불렀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 잔치에서 장성한 영자의 아들이 옆에 서 있는 모습을 본 한 어르신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다 큰 아들 앞에서 네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그 어르신은 영자에게 택호를 받으라고 권했다. 처음엔 "택호 받으면 나이 들어 보이잖아요"라며 머뭇거리던 영자 씨도, 그것이 본인을 어른으로 존중한다는 뜻이라는 말을 듣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후 이사 온 귀촌 여성들과 함께 택호를 받고, 그 의미를 나누게 되었다.
죽전2리의 택호 문화는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어르신들이 지어주는 이름에 '이름값'으로 5만원을 내는 날이면 마을에서는 자연스럽게 막걸리 파티가 열려 축제처럼 즐거운 하루가 된다. 이름을 받는 일은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작은 의식이자, 모두가 함께 웃고 즐기는 문화가 된 것이다. 요즘은 본인이 원하는 택호를 직접 정하기도 한다. 한옥에 사는 이는 '한옥댁', 교수님의 아내는 '교수댁'처럼 스스로 호칭을 선택하며 공동체 속에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만들어간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자리를 인정하는 일이다. 이름에는 관계의 방식이 담기고, 부르는 이의 태도와 공동체가 서로를 대하는 규범이 녹아 있다. 전통이라고 해서 반드시 고루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관습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를 따뜻하게 이어주는 문화가 될 수 있다.
택호는 단지 옛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을이 새로운 구성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존중하는지를 보여주는 따뜻한 호칭이었다. 그 안에는 '어른을 어른답게 대하는 마음'이 있었고, 전통은 그렇게 오늘의 일상 속에서 새롭게 쓰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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