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유미 작전명이유 대표
한때는 '사투리'라 불리며 고쳐 써야 할 말로 여겨졌던 말들이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것을 '제땅말', 곧 '그 땅의 말'이라 부른다. 지역에서 사람들끼리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말 속에는 단순한 의사소통을 넘어서는 삶의 결이 스며있다. 말투와 억양, 단어 하나하나에는 각자의 생활방식과 감정, 그리고 공동체가 관계를 맺는 방식까지 오롯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칠곡군 왜관읍 석전2리는 캠프 캐럴(미군부대) 후문 인근에 자리한 전통마을이다. 1970~80년대부터 이곳에는 외국인을 상대로 한 상권이 형성되었고, 많은 가정이 집 한 칸을 외국인에게 사글세로 내어주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렇게 생긴 일상의 접점 속에서, 마을 어르신들은 외국인 세입자와 소통하기 위해 '혼종어'라 부를 만한 독특한 언어를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예가 '와르머니'와 '일렉트머니'다. 각각 '수도세' '전기세'를 뜻하는 말이다.
이 독특한 언어 문화를 기록하고자 '말모이 사전'을 만들던 청년들은 처음 '와르머니'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적잖이 당황했다. '일렉트머니'는 'electric money'에서 유추해 전기세를 뜻한다는 짐작이 가능했지만, '와르머니'는 의미조차 쉽게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뜻을 알 수 없어 사전에는 설명을 덧붙이지 못한 채 '뜻 미상'이라는 표기만 남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지역 어르신들의 도움으로 이 단어의 해석이 더해졌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하고 여쭈었더니, '워터네!' 하시더라." '와르머니'는 미국식 '워터(water)' 발음인 '워러(water)'가 경상도 억양과 만나 '와르'로 들리게 되었고, 여기에 '머니(money)'가 붙으며 자연스럽게 탄생한 말이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기억과 감각이 더해지며, 집단지성을 통해 의미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이야기를 곱씹다 보면, 단어 하나에도 시간과 경험이 켜켜이 쌓여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어르신들은 영어를 따로 배우거나 사전을 찾아본 것이 아니라, 외국인과 마주하며 삶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실용 언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 안에는 생계를 위한 지혜, 낯선 이들과 맺은 관계, 시대를 건너온 생활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제땅말은 단순한 지역 방언이 아니다. 그 안에는 한 세대가 살아낸 시간과 감각, 그리고 공동체적 삶의 방식이 배어 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말'을 조금만 더 주의깊게 듣고 이해하려 할 때, 세대와 지역, 문화를 가로지르는 벽을 넘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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