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대신이 아닌 함께

  • 이유미 작전명이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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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8-07 06:00  |  발행일 2025-08-06
이유미 작전명이유 대표

이유미 작전명이유 대표

농촌 사회에서 오랫동안 익숙했던 의사결정 방식은 '대의제'에 가까웠다. 마을 이장이 주민을 대표해 외부와 소통하고, 회의에서 결정 사항을 전달하면 "이장이 하라는 대로 하죠"라는 말로 논의는 금세 마무리되곤 했다. 빠르고 효율적이지만, 정작 주민 개개인의 목소리는 드러나기 어려운 구조였다. 의견이 단순 전달되는 구조에서는 서로의 진심이나 맥락까지 반영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공동체 활동과 문화 프로그램이 이어지면서 회의의 풍경도 점차 달라지고 있다. 결정의 '속도'보다 그 과정에서의 '참여'를 중시하는 분위기, 즉 모두가 함께 참여하고 공감하는 '합의 중심의 구조'로 서서히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주민들이 주체가 되는 이 변화는 마을 안에 새로운 가능성을 심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구니 토론' 방식이다. 이 토론 방식은 찬반으로 나뉘는 다수결이나 소수 의견에만 힘이 실리는 구조와는 분명히 다르다. 마치 바구니에 여러 사람의 다양한 의견을 하나하나 담아내듯 모은 뒤, 그것을 조율하고 통합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는 주민 각자가 결정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문화를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다.


칠곡인문학마을 축제에서 시민 기획단이 진행한 '줍깅' 프로그램 역시 이런 합의의 힘을 잘 보여준다. 쓰레기를 담을 봉투 하나를 정하는 데만 두 시간이 넘는 논의가 이어졌다. 환경을 생각하면서도 새로 검정 비닐봉투를 사는 게 과연 맞는가, 일반 종량제 봉투는 다 채우지 못하면 오히려 자원이 낭비되는 건 아닌가. 치열한 의견 교환 끝에, "각자 집에 있는 헌 종이봉투나 쇼핑백을 가져와 담고, 분리수거할 때 다시 나눠 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오랜 논의 과정에서 누구도 밀려나지 않았고,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해답을 함께 찾아냈다. 작은 결정이었지만, 이 과정이 주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물론 빠르고 간편한 결정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 그러나 마을은 누군가의 주도로 움직이는 공간이 아니라, 서로의 생각을 듣고 시간을 들여 조율하며 함께 만들어가는 삶의 현장이다.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지금, 마을은 더 이상 몇몇 리더의 헌신만으로 지속되기 어렵다. 주민 각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며 함께 결정하는 경험이 일상이 될 때, 비로소 공동체는 지속가능한 문화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마을은 단순한 생활 공간을 넘어, 주민 개개인이 소속감을 느끼고 서로의 삶에 진심으로 참여하는 진정한 공동체로 거듭나고 있다. 함께 결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 과정이, 앞으로 더 많은 마을에 뿌리내리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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