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혼 樓亭 .27] 사미헌 장복추의 성주 금수면 '자언정'

  • 입력 2006-12-18   |  발행일 2006-12-18 제28면   |  수정 2006-12-18
조선말 영남 최고 학자의 인재양성 강학처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한국의 혼 樓亭 .27] 사미헌 장복추의 성주 금수면
사미헌이 78세 이후 강학한 자언정 전경.

좋은날 쇠한 몸 붙들고 진경을 찾으니(勝日扶衰眞境覓),

온 시냇가 좌우에는 푸른 절벽뿐이구나(一川左右但蒼壁).

이 사이에 길 있어 공연히 머뭇거리노니(此間有路空),

덮인 안개와 쉬어가는 노을에 방울방울 이슬이로다(冪霧棲霞滴復滴).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1815~1900)가 자언정(玆焉亭)에서 읊은 '묵방십영(墨坊十詠)' 중 '멱진탄(覓眞灘)' 원운이다. 성주군 금수면 무학리는 대가천이 흐르고, 한강(寒岡) 정구가 명명한 무흘구곡이 뻗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 자리한 묵방서당(墨坊書堂)에는 자언정이란 당호가 마루 위에 걸려있다. 자언정은 조선말 사미헌 장복추의 강학처로 수많은 학자들이 우국의 울분을 토로하며 유학을 연구하였던 곳이다.

#조선말 영남의 삼학자 중 한 사람인 사미헌

사미헌은 조선말 영남의 삼징사(三徵士: 장복추, 김흥락, 류주목)요 삼학자(장복추, 이진상, 김흥락)로 꼽힌다. 여헌(旅軒) 장현광의 9세손으로 태어난 사미헌은 7세부터 수학할 때 다소 지둔(遲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00번을 소리내어 계속 읽어서 외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 노력을 하자 마침내 문리가 크게 터졌다고 한다.

23세 무렵 깨달은 바 있어 과거공부를 접고 근사록, 심경, 주자서 등을 깊이 연구하였고, 이후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널리 박통하여 오직 지행의 실천에 목표를 두었다. 그의 학덕이 높아지자 나라에서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 등의 벼슬을 내렸지만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조부 각헌(覺軒) 장주에게 수학할 때 조부는 "여헌 선조의 교훈에 '천하 제일 사업을 할 수 있어야만 천하제일 인물이 된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깊이 생각하고 행하라"고 가르쳤다. 당시 사미헌은 영남 제일의 학자로 추중을 받았다.

#도의(道義)로 벗을 사귐

사미헌은 특별히 친근한 벗으로 유하(柳下) 정삼석(鄭三錫),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거암(菴) 송인각(宋寅慤) 등을 꼽는다. 널리 사랑하고 모든 이를 포용해 친하며 성근 벗이 따로 없었으나, 폐와 간을 서로 비출 정도로 터놓고 학문을 토론했던 벗은 이 세 사람정도였다.

당시 사방의 선비들이 찾아와 그에게 수업을 청하였다. 문 앞에는 늘 신발이 가득하였다고 한다.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이 쓴 언행기술에 의하면 '사미헌 선생은 비록 사도(師道)로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지성으로 고심하면서 인재를 성취하려 하였고, 그들의 편벽된 곳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래서 각자 그 사람의 재질에 따라 어질고 어리석은 사람, 크고 작은 기량을 모두 이루어주었다'고 하였다.

사미헌기념사업회 자료에 의하면 대표적인 제자로 회당(晦堂) 장석영, 공산(恭山) 송준필, 농산(農山) 장승택, 심재(心齋) 조긍섭, 위암(韋菴) 장지연 등 300여명이 사방에 산재한 것으로 전한다.

#사미헌의 남다른 자녀교육

사미헌은 여헌으로부터 내려오는 가학의 정신을 이어받았고, 조부 각헌공에게 특별한 훈화를 받았다. 사미헌은 자제들이 남을 나무라면 "너는 참으로 자기 밭은 놓아두고 남의 밭을 매는도다(汝眞可謂舍己田, 而藝人田也)"라고 하였다.

사미헌이 남긴 훈가구잠(訓家九箴)을 보면,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아홉가지로 분류하여 경계하고 있다. 1)부모섬김(事父母) 2)형제우애(友兄弟) 3)부부간에 삼감(謹夫婦) 4)자손교육(敎子孫) 5)제사공경(敬祭祀) 6)빈객응접(接賓友) 7)친척과 돈독(敦親戚) 8)독서에 힘씀(勉讀書) 9)농상을 권장함(勸農桑)이었다.

사미헌은 옛 제도나 정신을 원형 그대로 보존함을 중요시하였다. 남명(南冥) 조식의 문집을 중간할 때 심재(心齋) 조긍섭을 대표로 다소 수정을 가하자 "100% 합당하다해도 감히 고칠 수 없거늘, 더구나 합당치 못함에 있어서 이겠는가. 이대로 수정하여 중간(重刊)을 한다면 후세의 기롱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갑신년에 국가에서 의복제도를 개선하려 할 때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였는데, 사미헌은 상소를 올려 애민(愛民)과 절용(節用)에 힘쓰지 않고 제도에만 매여 한심한 일만 하고 있다며 단호히 거부하였다.

#자신에 대한 일생의 경계

45세 무렵 거처하는 곳을 사미헌이라 이름하고, 자신의 호로 삼게 된다. 사미헌의 사미(四未)란 중용 제13장의 "자식에게 요구하는 것만큼 부모 섬김에 능치 못하며, 신하에게 요구하는 것만큼 임금 섬김에 능치 못하며, 형에게 요구하는 것만큼 형 섬김에 능치 못하며, 벗에게 요구하는 것만큼 내가 먼저 베풂에 능치 못하다"라는 공자의 사미능(四未能)이란 말에서 취한 것이다. 사미를 정자 이름과 자신의 호로 삼으면서 효제충신(孝悌忠信)에 힘쓸 것을 맹세했던 것이다.

사미헌이 강학한 장소로는 거창군 가조면에 당동서당(唐洞書堂)이 있었고, 76세무렵에는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의 녹리서당(里書堂), 일명 구욱재(求勖齋)에서 강학하였다. 녹리서당은 현재 사미헌의 고손자 되는 장지윤옹이 지키고 있다.

다시 78세 되던 해, 나라가 갈수록 혼란해지자 학문을 후세에 전하고자 여헌이 임란 때 피란처로 거처한 유적지인 성주군 금수면 묵방으로 들어가 집 한 칸을 매입하여 자언정(玆焉亭)이란 현판을 걸고 강학을 하였다. 자언(玆焉)이란 송나라 주자의 시(詩) 중 '자언필모경(玆焉畢暮景: 여기에서 늘그막을 마치려 하노라)'이라는 구절에서 취하여 왔다. 현재는 묵방서당(墨坊書堂)으로 현판이 걸려 있고, 마루위에 자언정 현판이 그대로 남아있다.

#하루 한 끼로 장수한 사미헌

사미헌은 당시 86세까지 살면서 장수하였다. 술은 한 잔으로 족하였고 식사는 하루에 한 끼였다. 몇 숟가락 먹는 정도의 엄격한 소식가였으며 찬의 가지 수도 대단히 소박하여 한 끼 식사에 한가지의 찬 정도였다. 그러나 만년으로 갈수록 기력이 강하고 맑았으며 학문에 전일하였다고 한다.

저서로는 독서쇄록, 역학계몽, 사서계몽 숙흥야매잠집설, 가례보의, 삼강록간보, 훈몽요회, 문변지론, 동몽훈, 성리잡의 등이 사미헌집 11권, 속집 2권, 부록 6권 등 총 19권에 전한다.

예학과 성리학에 통철한 사미헌은 조선말 유학의 보존을 위해 온몸으로 지탱한 순유(純儒)로서 영남학을 결집한 태산북두같은 인물로 꼽혔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은 기획시리즈입니다)

[한국의 혼 樓亭 .27] 사미헌 장복추의 성주 금수면
사미헌이 제자들을 가르친 녹리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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