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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과 부처님은 같다'는 생각으로 언제나 갓 지은 고슬한 밥을 밥상에 올린다는 철칙을 가진 여여심 공양주보살. |
새벽, 산사(山寺)는 고요히 눈을 뜬다.
칠흑같은 어둠, 정적 속에서 한 여인이 가만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시계는 오전 3시50분, 절집생활을 해온 지난 20여년간 그녀는 매일 이맘때 눈을 떴다. 조용히 이부자리를 정돈하고, 늘 해오던 것처럼 108배를 세 번 반복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대자대비한 부처님 앞에 한없이 몸을 낮추고, 가없는 은공에 머리를 조아린다. 이제 그녀는 방을 나와 어딘가로 향한다.
이름은 여여심(如如心·54). 그녀는 영천 은해사 부근 작은 암자의 공양주보살이다. 암자의 소박한 공양간은 그녀의 직장이자, 삶의 터전이자, 유일한 쉴 곳이기도 하다. 3시50분 기상해서 6시에 주지스님을 위해 뜨끈한 공양을 올린다. 산세 좋고 인심 좋은 충청도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녀가 이곳 은해사 암자에서 부처님 공양을 맡기까지 어떤 사연이 있었던 걸까?
10세 되던 해, 그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남의 집살이를 택했다. 8세에 아버지를 잃고, 가난한 형편에서 동생들을 위한 선택이었다. 남의 집과 식당 일을 전전하며, 20대 청춘을 보냈다. 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남자는 잠깐의 행복, 그리고 눈물을 선물했다. 불행했고, 참혹했으며, 고통스러웠다. 결국 부부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됐다. 그 때 친정엄마는 실의에 빠진 그녀를 절로 보내며 망가진 심신을 추스를 것을 제안했다.
얼마후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이 눈에 밟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다니던 직장은 누군가에 의해 사표처리 되는 등 이미 그녀의 자리는 없었다. 어머니는 30대 중반의 딸에게 "여자가 한 번 결혼해 재미를 못보았으면 그걸로 끝이다. 다시 결혼해서 무엇하랴"라면서 매정하게 딸을 절로 보냈다. 그날로 속세와의 인연은 끝이었다.
그녀가 머무는 이곳 암자는 선승들이 수행하는 도량, 일년 내내 청빈하고 절도 있다. 그녀는 노스님을 비롯한 몇몇 스님과 함께 살고 있다. 바깥사람이 암자를 찾는 일도, 그녀가 바깥세상으로 나갈 일도 거의 없다. 그녀는 일년에 한두 차례 정도만 바깥 나들이를 할 뿐 줄곧 산에 머문다. 그렇다고 그녀의 하루가 한가한 것은 절대 아니다.
계절이 시작되는 이맘때 공양주 보살의 하루는 유난히 분주하다. 돋아나는 새순을 거두고, 일년 동안 먹을 부식거리를 마련해 두어야 한다. 텃밭의 농사를 준비하고, 틈틈이 산에서 나물도 채취한다. 4월에서 5월까지 봄기운이 물씬한 팔공산 자락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연초록의 향연이 벌어진다. 어리고, 연하며, 투명하기까지 한 초록은 볼 때마다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녀는 "언제보아도 가슴 떨리는 행복"이라며 봄날의 정취를 표현한다.
공양주 보살, 가끔 숙명처럼 지내온 세월이 무상하고, 회한이 사무친다. 자신을 절로 보낸 어머니가 야속하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것도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어쩌면 다음 생에는 원하던 선생님이 될 수도 있으리라 살짝 기대도 해본다.
속가이름을 '조가'라고만 밝힌 여여심 공양주 보살의 마지막 소원은 "일하다 쓰러지는 것"이다. 여여심 보살은 "어떤 때는 힘들어서 죽을 것 같지만, 스님들이 잘 드시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제 소원은 일하다 죽는 거예요. 일이 좋아요. 봄날에는 산나물 뜯고, 도토리가 날 때는 도토리 줍고, 좋은 재료로 스님들 수행하실 수 있게 떡해드리고…."
◆여여심 보살의 사찰음식 팁
☞싱싱한 재료를 사용한다= 제철에 나는 재료를 싱싱한 상태로 이용한다. 이맘때 산에는 온갖 나물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두릅, 참나물, 오가피순 등을 뜯어다 나물로 먹고, 들녘에 자라는 쑥 등은 떡을 만든다.
☞정성껏 만든다= 스님이나 부처님이나 똑같다고 생각한다. 부처님 드실 음식이라 생각하고 몸과 마음을 정성들여 음식을 만든다. 스님께는 절대로 찬밥을 드리지 않고, 언제든 갓 지은 고슬한 밥을 올린다.
☞창의적으로 만들어본다= 절에서 사용하지 않는 육류와 오신채 등을 대신할 재료를 창의적으로 개발한다. 계란지단은 찹쌀에 색을 내 대신 사용하고, 설탕은 조청을 직접 달여 사용한다. 과일은 효소를 빼서 이용하고, 된장·고추장·간장 등은 반드시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 공양주 보살이란 ?
여여심 보살을 취재하는데 묘한 우연이 있었다. 기자가 취재대상을 찾기 며칠 전 대구경북의 몇몇 스님들이 모여서 '공양주 보살'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자리에 있던 스님들 대다수가 '은해사 A암자의 밥이 가장 맛있고, 정성스럽다'는 데 의견을 통일했다. 한 스님은 'A암자 보살의 밥은 속가에서 먹던 어머니의 밥맛'이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후 '공양주 보살'을 주제로 취재에 나선 기자에게 그 자리에 있었다는 한 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A암자를 추천해줬다.
조계종 한 스님은 "스님들이 깨달음을 위해 정진한다면 공양주 보살은 스님들의 건강을 지키며, 꾸준한 수행의 힘을 제공한다. 지금은 대부분 절의 공양주가 직업처럼 돼버렸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공양주는 불가의 가르침과 인연 없이는 하기 힘든 수행자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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