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遷位 기행 .17] 응와 이원조(1792~1871)

  • 입력 2011-02-16   |  발행일 2011-02-16 제22면   |  수정 2011-02-16
방대한 저서 남긴 조선후기 대표적'학자관료'
글씨 : 土民 전진원
[不遷位 기행 .17] 응와  이원조(1792~1871)
응와가 자신의 수양과 후학 양성을 위해 1851년 성주 포천구곡 끝자락(가천면 신계리)에 건립한 만귀정의 부속 건물인 만산일폭루(萬山一瀑樓). 자연과 융합 속에서 참다운 인격과 학문이 이뤄진다는 응와의 사상이 녹아있는 건물이다.

응와(凝窩) 이원조(1792~1871)는 학자 관료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라 할 만하다. 학자요 문인이며 행정가이기도 했던 그는 벼슬 생활 63년 동안, 항상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기는 마음자세를 지녔다. 공직에서 물러났을 때는 벼슬에 연연해하지 않고 수신과 학문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음으로써 큰 학문적 업적도 남길 수 있었다. 그는 유가(儒家)가 지향하던 학자적 소양과 경륜가로서의 능력을 겸비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학자 관료였다. 학자적 소양을 바탕으로 영남 주리학(主理學)의 이론 정비와 학통의 수수(授受)에 기여하며 생전에 이미 영남의 사표로 추앙받았던 그는 노론 집권기라는 시대적 제약 속에서도 관료로서도 능력을 발휘, 남다른 업적으로 인정을 받았던 인물이다.


과거 급제 후 10년간 독서 매진하며 인격 함양

응와는 학문을 해도 단순한 답습이 아니라, 살아있는 학문을 중시했다. 당시 답습을 위주로 하던 영남학자들의 학풍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이다.

"기호학자는 주로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일삼아 오류가 없을 수 없고, 영남학자는 오로지 답습하는데 치중하기에 전혀 참신함이 없다. 답습하기만 하여 실제로 깨닫는 바가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오류가 있더라도 스스로 터득해 깨달음이 있는 것이 좋다. 언뜻 보면 길을 따라가며 한결같이 정자·주자의 전통을 따르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공허한 말일 따름이니, 남에게 베풀어도 증세에 따라 처방하는 이익이 없고 스스로 간직해도 심신으로 체험하는 효과가 없다."

자신이 퇴계의 학통을 이은 영남학자이면서도 기호학풍의 장점을 인정한 점에서 그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하겠다.

"학문의 길은 선과 악을 분별하여 착실하게 선을 실천하는 것일 뿐이다. 선이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더 큰 지혜가 없고, 선을 지켜나가는 것보다 더 큰 어짊이 없으며, 선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없다. 그러므로 천하만사는 선을 따르는 것일 뿐이다." 응와의 이 말도 그가 어떤 삶을 지향하고 실천했는지 잘 드러내고 있다.

응와가 이처럼 삶과 학문에 대한 기틀을 확실히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가학(家學)에 힘입은 바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응와는 10세에 사서 등을 통독하고 12세에 과거에 필요한 여러 문체를 두루 익혔는데, 문필이 빠르고 막힘이 없어 물 흐르듯 했던 모양이다. 이런 그가 18세에 두차례 향시에 합격하고 증광시에 급제하자, 그의 부친(양부) 농서(農棲) 이규진과 생부 함청헌(涵淸軒) 이형진은 어려서 등과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경계하면서, 조용히 머물러 10년 동안 글을 더 읽도록 분부했다. 응와는 이 가르침에 따라 조급하게 나아가려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부득이하다''어쩔 수 없다'는 나라 망치는 말"

일찍 과거에 급제한 응와는 순조·헌종·철종·고종의 4조(四朝)에 걸쳐 벼슬생활을 하면서 국정의 폐단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 폐단을 개혁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 특히 지방관에 임명될 때마다 폐정을 과감히 개혁하며 민생을 돌보는데 최선을 다했다. 공직자로서 어떻게 임했는지 알게 하는 그의 말이다.

"오늘날 나라 일을 맡은 자들은 오직 눈앞의 일만 처리하며 구차하게 세월 보내기를 계책으로 삼고 있다. 사사로움을 좇아 일을 처리하면서 '부득이하다(不得已)'고 하고, 고치기 어려운 폐단이 있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無奈何)' 하니, '부득이''무내하' 이 여섯자야말로 나라를 망치는 말이다. 요즘 같이 기강이 해이해진 시기에 정령을 시행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바가 없지 않지만, 위에 있는 자들이 만약 과감한 뜻으로 쇄신해 백관들을 독려한다면 천하에 어찌 끝내 고치지 못할 폐단이 있을 것이며, 어찌 참으로 부득이한 일이 있겠는가. 예컨대 과거장에서 불법이 자행되는 폐단이 '무내하' '부득이'가 특히 심한 경우이지만, 이를 막으라는 어명이 내려질 때는 분명 실효가 있어 급제자 명단이 발표되기만 하면 사람들이 모두 공정하다고 생각하니, 이로 미루어보면 폐단을 고치고 바꾸기가 어렵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회를 놓치게 되는 까닭은 매번 규범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견고하지 못하고 법의 시행이 엄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한 것은 오로지 수령의 탐학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탐학이 수령의 죄만은 아니다. 재상이 사치하는 까닭에 수령에게 뇌물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고, 수령은 재상의 요구 때문에 백성을 착취하지 않을 수 없다. 일년에 한 번 하던 문안인사가 계절마다 하는 문안으로 바뀌고, 계절 문안은 매월 문안으로 바뀌었다. 옛날에는 음식이나 의복으로 하던 문안이 지금은 순전히 돈으로 변해 약값이라고 명목을 삼는데, 많으면 1천냥이요 적어도 100냥을 내려가지 않는다. … 뇌물을 받는 재상부터 먼저 형벌로 다스리는 것이 사치한 세태를 혁파해 질박검소한 풍속으로 되돌리는 발본색원의 방법이 될 것이다."



정통유학, 현실 정치·사회 학문에 접목시켜

응와는 비록 벼슬길에 발을 디뎠으나 자신의 본령은 학문에 있음을 늘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그가 좋아하는 자연으로 돌아가 학문과 더불어 생을 마감하리라는 생각을 잊지 않고 있었다.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1851년 가야산 북쪽 포천(布川)구곡 끝자락에 만귀정(晩歸亭)을 지은 그는 그 후 벼슬길을 오가며 이곳에서 학문 연구와 저술, 후학 지도로 만년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공부과정을 술회하기를 "젊은 날에는 과거문(科擧文)을 익히다가 중년에는 문장학(文章學)에 힘썼으며, 늦게서야 성리학(性理學)에 뜻을 두었다"고 했지만, 과거 급제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공부했다.

21세에 서료(書寮)를 마련한 뒤 지은 명문(銘文)에서 문장을 다듬는 버릇에 빠져 진정한 학문을 소홀히 함을 반성하고 있다. 다음 글에서도 그의 갈등을 엿볼 수 있다. "서료명을 짓고 난 이듬해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읽었다. 깊고도 그윽한 맛이 있었다. … 평생동안 이 경지를 추구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병이 심해져 전념해 읽을 수 없게 되자 손가는대로 당송팔가문을 한 권 잡고 한가하게 읽어내려갔다. 처음에는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놀라울 따름이었는데, 읽어내려가는 도중에 달콤히 취했다가 끝내는 황황히 추구하여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전에 무슨 책을 읽었는지조차 잊어버렸으니, 어물전에 오래 있다가 비린내를 느끼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오호라 반성하리로다."

응와는 이처럼 거듭된 반성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격의 완성이 독서의 본질임을 깨닫고 성리학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응와문집' 22권, '응와속집' 20권, '성경(性經)' 4권, '응와잡록', '탐라록(耽羅錄)', '근사록강의' 등 방대한 저작을 남긴 그는 정통 유학을 하면서도 현실적인 정치사회에 관한 학문도 소홀히 하지 않은, 현실을 알고 접목하는 이상적인 학자였다. 응와의 학문은 그의 조카 한주(寒洲) 이진상(1818 ~86)으로 이어져 한주가 대석학이 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1871년 응와가 별세하자 조정은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애도했으며, 장지에 모인 이들이 1천여명이었다.


■ 이원조 약력

△1792년 성주 출생 △1806년 풍양 조씨와 혼인 △1817년 예조·병조좌랑 △1838년 순조실록 편찬 △1840년 강릉부사 △1841년 제주목사 △1849년 금강산 유람 △1851년 만귀정 건립 △1856년 대사간, 병조참판 △1881년 시호 정헌(定憲 : 순정한 품행이 법도에 어긋나지 않음을 定이라 하고, 선을 행하여 모범이 될 만함을 憲이라 한다)


제수로 생전에 좋아하던 집장 꼭 써

잔 올릴 때 도적·어적·계적 차례로

■'응와 불천위'이야기

성주의 한개마을 응와종택은 북비(北扉)고택이라고도 불린다. 이 명칭은 응와의 증조부인 이석문이 사도세자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남향의 문을 북향으로 바꾼데서 유래한다. 사람들은 그의 충절을 기려 북비공이라 불렀다. 응와가 사랑채인 사미당을 갖추고 북비채를 중건, 오늘날 종택의 규모를 대부분 이루었다.

응와 5세 종손 이수학씨(74)는 "60년 전 중학교 3학년 때 도남서원에서 유림들이 불천위를 결정했다. 국불천 자격은 충분하나 당시 나라가 없는 상황이라 도불천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응와 불천위 제사(기일 음력 8월2일)는 응와종택 사랑채인 사미당에서 지낸다. 응와종가는 10여년 전부터 제사시각을 기일 밤 9시로 바꿨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시대 환경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당시 종손은 4대조 기제사도 2대조까지로 축소, 주위로부터 혁명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절친한 친구가 그 일 때문에 절교를 선언할 정도였다 한다.

평소 제관은 40여명이며, 제사 절차 등은 별 차이 없으나 제수로 집장을 꼭 사용한다. 응와가 평소 좋아하던 음식이기 때문이다. 술잔을 올릴 때 도적·어적·계적을 순차적으로 올리는 점이 다른 종가와 달랐다.

응와종가에서 2010년 9월9일 불천위 제사를 일반인에게 처음으로 공개했다. 한개민속마을보존회의 요청으로 이날 공개적으로 진행된 불천위제사에는 제관이 평소보다 많은 60여명이 참례했고, 전통 예법과 음식에 관심 있는 사람 등 일반인 70여명이 참관했다.

오후 8시에 시작된 제사는 40분 정도 진행됐고, 참석자 모두에게 음복을 제공했다. 향후 불천위제사 공개에 대해 종손은 쉽지 않을 듯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한편 응와종가는 지난 10일 응와영정, 응와문집 목판(441점), 고문서 등 응와 유물 500여점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했다. 2001년 개관한 국립제주박물관에 대여했던 유물로, 이번에 대여기간이 만료되면서 응와종가가 국학진흥원에 기탁기로 함에 따라 제주박물관에서 인수해오게 되었다. 김봉규기자



◇'불천위 기행'시리즈 기사는 이번주부터 격주로 수요일자에 게재합니다

[不遷位 기행 .17] 응와  이원조(1792~1871)
지난해 9월 처음 공개적으로 진행한 불천위 제사 모습. 종택 사랑채인 사미당(1845년 건립) 마루에 제상을 차리고, 제관들은 마당에서 참례한다.
[不遷位 기행 .17] 응와  이원조(1792~1871)
나라에서 그려 하사한 응와 영정. 지난 10일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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