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년간 매주 정신분석 세미나…계명대 유럽학과 임진수 교수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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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0-30   |  발행일 2015-10-30 제37면   |  수정 2015-10-30
“정신분석은 한마디로 ‘말치료’…모든 사람에게 진짜 자기 말을 하게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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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대학에 단 하나의 정신분석학과가 없는 가운데도 정신분석의 고독한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임 교수. 그는 취업과 실용 지상주의 속 지성인의 욕망의 진짜 번지수를 찾아주기 위해 프로이트와 라캉을 다각도로 연구하고 있다. 평생 벗처럼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 세계 각국의 프로이트 번역본과 정신분석 사전 등을 자식처럼 돌봐주며 정년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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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치료의 전제 조건은 경청
진실에 닻 내린 말을 할 때
영혼은 비로소 자유로워져

우리의 온갖 정신적 증상은
인정의 욕망 왜곡에서 발생
괴로움 벗어나는 길은 인정

대뜸 자신의 ‘비겁함’부터 고백했다. 청년기 그는 알코올에 의존하기 위해 ‘고립주(孤立酒)를 자청했다. 한편으로는 문학에도 의존했다. 한쪽은 알코올 의존적 ‘증상의 길’, 또 한쪽은 문학을 통한 ‘승화와 치료의 길’이었다.

천재와 광기를 품고 서울대 사범대 불어교육학과에 들어간다. 툭하면 ‘자살욕’이 일었다. 그런데 죽고 싶다는 그 맘이 자살욕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양면성도 갖고 있었다. 문학을 포기하고 정신분석을 만난다. ‘국내 지식인 중에서 ‘욕망’을 정신분석학적으로 가장 예리하게 분석할 수 있는 교수 중 한 명인 계명대 유럽학과 임진수 교수(60). 그를 지난 월요일 스미스관 417호 해묵은 책 내음이 잔향처럼 번지는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2005년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라플랑슈·퐁탈리스 공저인 ‘정신분석사전’을 번역 출간했다. 국내 정신분석학계에서는 이를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2002년에는 ‘프로이트 라캉 정신분석 학교’를 개설했다. 지난 13년간 매주 수요일 정신분석 세미나를 개최하고 매 학기 한 권씩 책으로 묶고 있다. 최근까지 12권의 ‘정신분석 세미나 총서’를 집필했다. 향후 10여권이 더 나올 예정이다. 이런 그가 언론과의 인터뷰가 처음이란 게 납득이 안 됐다.

서울대에서 ‘라캉의 정신분석 비평에 관한 연구’로 불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프랑스로 건너가서 파리 8대학 정신분석학과에서 ‘도(道)와 큰 타자(他者)’로 DEA(박사학위 전 학위)를 취득하고 정신분석가 수련과정인 교육 분석을 8년간 받고 돌아온다. 1984년 계명대 불문학과에서 강의를 시작했지만 불문학과가 폐과된 후 현재는 유럽학과에 있다. 그는 아직 정신분석학적으로 비상하지 못한다. 정신분석학과가 있는 대학이 단 한 군데도 없는 탓이다.

▲유럽발 정신분석학의 한국 유입 경로가 궁금하네요.

“프로이트(1856~1939) 시기는 일제강점기와 일치해요. 선구자들은 일역본을 가지고 공부했고 번역도 일역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중역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복 후 영국의 심리분석학자 제임스 스트레이치가 프로이트의 딸 안나 프로이트와 협력해 발간한 24권짜리 영역본을 텍스트로 공부하거나 번역했기 때문에 일본과 영미학자의 오역과 오인을 그대로 유입하거나 그보다 더 왜곡하기도 했습니다.”

▲오역의 구체적인 사례가 궁금하군요.

“‘트립(Trieb)’이란 중요한 프로이트 용어가 있습니다. 이게 일본으로 들어올 때 ‘본능’으로 변역됐다가 나중에는 ‘충동’으로 오역됩니다. 트립도 두 개로 쪼개집니다. 하나는 삶의 트립으로서 ‘에로스’, 다른 하나는 죽음의 트립으로서 ‘타나토스(죽음의 신)’입니다. 오역대로라면 죽음의 트립을 ‘죽음의 충동’이라겠죠. 죽음의 트립은 인간의 심리를 움직이는 지속적인 힘입니다. 죽음의 트립은 편안히 쉬고 싶은 것으로도 드러나죠. 이런 트립을 충동의 뉘앙스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죠. 그래서 저는 죽음의 트립을 ‘욕동(欲動)’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정신분석학이 학문적으로 어떤 계보와 제약조건 속에서 태어났는지 알려주시죠.

“현대 정신분석 비평은 크게 3개 축이 있습니다. 1960~80년까지 주류는 소쉬르적인 ‘구조주의적인 언어학 비평’, 또 하나가 ‘정신분석학적 비평’, 마지막이 ‘마르크시스트적인 비평’입니다. 셋 중 마르크시즘이 먼저 붕괴되죠. 남은 두 비평이 묘하게 결합됩니다. 정신분석은 언어학을 품을 수밖에 없었죠.”

▲교수님은 프로이트 못지않게 라캉을 아주 편애하는 것 같더군요.

“라캉은 구조주의의 선구가 된 현대 언어학과 기호학의 창시자인 소쉬르로부터 시작된 현대 구조언어학의 연구 성과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접목시켜 ‘언어학적 정신분석’이라는 제2의 정신분석 혁명을 일으킵니다. 제가 프로이트 라캉 학교를 세운 것도 바로 제1·제2 정신분석 혁명을 일으킨 학자의 정신을 이어받고 싶어서죠.”

▲정신분석학이란 게 결국 현대인의 잠재의식화 된 욕망의 번지수를 정확하게 찾아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언뜻 선불교의 해탈·깨달음 같기도 하고요.

“잠재의식과 집단무의식은 프로이트의 개념이 아니라 프로이트의 제자인 융의 개념입니다. 프로이트는 그러한 융의 개념이 학문적으로 엄격하지 않고 신비주의적이라고 해서 배척했습니다. 그것은 라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고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이 불교철학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분석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저항을 극복하고 무의식을 인정할 때 다시 큰 깨달음이 옵니다. 오히려 ‘깨어남’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지 모릅니다. 라캉은 ‘증상은 인정의 욕망을 오인하는 데서 오고, 치료는 그 욕망의 인정에 있다고 말했어요.”

▲교수님은 정신분석학 중에서 어떤 영역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시죠?

“정신분석은 심리학처럼 여러 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 학문이 아닙니다. 굳이 나눈다면 증상별로 신경증의 정신분석, 공포증의 정신분석, 도착증의 정신분석 등으로 나누거나, 삶의 시기별로 소아 정신분석, 청소년 정신분석, 성인 정신분석 등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그것은 지극히 편의적인 분류일 뿐입니다. 정신분석은 오히려 프로이트로부터 발원하여 여러 유파로 나뉘는 역사적인 과정에 따라 분류됩니다. 가령 융의 분석심리학, 아들러의 개인심리학, 안나 프로이트의 자아심리학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거대한 정신분석의 흐름에서 저는 프로이트에서 라캉으로 이어지는 정통 정신분석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의 정신분석 이론이 저의 유일한 관심사입니다.”

▲요즘 젊은이한테서 어떤 심리적 징후가 포착되죠.

“한국의 젊은 여성은 거울을 무척 자주 봅니다. 지하철에서, 화장실에서, 식당에서, 심지어는 수업하는 교실에서 거울을 보며 몇 번이고 화장을 고칩니다. 그들에게 물어보면 한결같이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 말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예쁘게’라는 말이 아니라 ‘보이고 싶다’입니다. 한국의 젊은 여성의 미의식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전제되어 있는 ‘제3자의 시선’을 분석해야겠죠. 말하자면 한국 여성의 미의식과 제3자의 시선의 관계를 분석해야 합니다.”

▲요즘 중독이 심각한 사회문제인데 그 정체가 궁금해요.

“중독 현상은 중독 너머의 ‘향락의 구조’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사랑을 받고 싶고 인정을 받고 싶은 인정의 욕망으로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태어나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면 엄청난 쾌락이 발생하고 이때 ‘향락’이 발생해요. 그게 너무 감미로워서 그 인정욕을 계속해서 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자극이 밖에서 지속 안 되면 인정의 욕망이 결핍으로 남습니다.”

▲철학사로 볼 때 그런 인식의 틀이 언제부터 형성되죠.

“소크라테스부터입니다. 그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욕망하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욕망한다’며 2천500년전에 ‘욕망이 곧 결핍’이라고 일깨워줍니다. 이 결핍이 허기증을 만들어내죠. 그 방식은 게임중독, 섹스, 권력욕, 인정욕, 심지어 거식증, 대식증 등 다양한 중독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 결핍의 구멍은 절대 충족되지 않죠. 그 구멍의 전제조건 자체는 바로 채울 수 없음이죠. 결핍의 그 구조를 해체시킬 수 없는데 자기한테 오면 다 낫게 해줄 수 있다고 하는 게 바로 혹세무민으로 허위의식이고 환상이고 망상이죠.”

▲요즘 인문학 토크의 대주제가 ‘어떻게 살지’인 것 같은데….

“생긴 대로 살면 됩니다. 문제는 자기의 생김새를 모른다는 데 있죠. 자기는 생긴 대로 산다지만 자기가 모르는 생김새대로 살아가죠. 저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요. 정신분석학으로 인간의 욕망은 누구도 파괴할 수도, 없어지지도, 충족될 수도 없어요. 대체도 안 됩니다. 우리의 온갖 정신적 증상은 인정의 욕망을 오인하고 왜곡하는 데서 발생하죠. 치료는 그 욕망을 인정하는 데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우린 욕망을 나쁜 것으로 보잖아요.

“욕망의 소멸은 죽음입니다. 살아있는 한 욕망이 따라다니죠. 욕망을 못 가지면 그건 우울증입니다. 욕망을 가져야죠. 그런데 그 욕망이 신경증을 만들죠. 욕망 때문에 살아 있고 그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벗어나는 길은 결국 ‘인정’입니다.”

▲향후 정신분석학의 과제는 뭐라고 봅니까.

“한국에서 정신분석은 아직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어요. 조금 내린 뿌리마저 왜곡되고 온전치 못합니다. 이런 학문적 현실에서 정신분석이 조금이라도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려면 정신분석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길뿐입니다. 정신분석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말치료(Talking cure)’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진짜 자기 말을 하게 하는 겁니다.”

▲그 전제조건은 뭐죠.

“경청입니다. 사실 저는 경청이라는 표현보다 불교 용어인 ‘관음(觀音)’이라는 표현을 더 좋아합니다. 정신질환자는 말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증상으로 말하는 거죠. 그와 반대로 정신분석 치료는 증상을 말로 바꿔주는 겁니다. 증상에 억압되어 있는 무의식의 진실을 말로 표현하고 나면 증상은 사라지고 정신적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진실에 닻을 내린 말을 할 때 영혼은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말이 많은 세상인데 말이 뭐죠?

“많은 이는 자기가 말의 주인이 되어 말을 사용한다고 믿죠. 사실은 사람보다 언어가 우선하고 언어가 우위에 있습니다. 결국 말이 말을 하는 거죠. 사람은 입을 수단으로 제공해주는 처지죠. 말이 내 입을 통해 말을 하고 있죠. 그런데 그 언어는 결코 전체가 아닙니다. 결핍을 내재한 전체이니 말로 다 될 것 같은데 결국 안 되죠. 창과 방패의 모순이 발생하죠.”

▲꿈은 뭐죠?

“꿈은 무의식의 주체가 의식적 자아에게 보내는 암호화된 편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 또 다른 ‘나’가 나에게 보내는 그 편지를 내가 읽어주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해독하고 이해해주지 않는다면, 무의식의 주체는 의식적 자아로부터 소외당한 것을 알고 얼마나 슬퍼하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밤마다 자아를 부르는 무의식적 주체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가 연출하고 주연을 맡은 꿈이라는 영화를 봅니다. 우리는 그 꿈의 메시지도 경청해야 합니다.”

그는 “정신분석은 무의식의 상형문자를 의식적 자아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또 정신분석을 ‘말치료’, 정신분석가를 ‘말벗’으로 정의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스미스관 계단을 내려왔다. 땅거미가 밀려오고 있었다. 말이 말을 살해하고 있는 대한민국. 이 나라 말치료의 첫단추는 어디에 있는가. 단풍의 ‘혼연일체’를 잠시 사색했다. 일사불란하게 추락을 준비하는 추색(秋色)의 하모니가 더없이 부럽기만 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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