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국박물관의 발전 가능성] <상> 독자적 문화를 꽃피운 조문국

  • 마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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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2-02   |  발행일 2015-12-02 제10면   |  수정 2015-12-02
신라권역서 출토된 적 없는 관모·관식 사용 “백제와 교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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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기록을 토대로 하면 조문국은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 벌휴왕에 의해 정벌되었다. 그러나 조문국의 후예인 의성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조문국은 결코 정벌이나 멸망을 당하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며 문화를 꽃피웠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신라에 의한 ‘정벌’이나 ‘멸망’이 아니라 (향토사학자 입장에서) 상당 기간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던 조문국의 역사를 재조명하면서, 동시에 지역민의 자긍심을 되찾기 위한 시민단체 주도의 자발적인 노력이 시작된 지 7년 만인 2013년 조문국박물관이 완공됐다. 잊힌 왕국에서 부활해 지역문화의 자긍심을 되살리는 상징이자 지역 문화관광산업을 이끄는 신성장 동력으로 진화하는 구심점에 선 조문국의 역사와 함께 개관 3주년을 앞둔 조문국박물관의 발전 가능성 등을 국내외 박물관의 우수 사례를 통해 살펴본다.

금성면 고분군서 출토된 유물들
조문국이 신라에 멸망한 것 아닌
대등한 위치서 세력 유지한 근거
신라와 다른 형태의 토기도 발견

당시 교통망·통신수단 발달 안돼
"신라군사 직접 통치” 설득력 약해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운 조문국

조문국은 의성군 금성면 일대를 근거지로 고대왕국을 건설해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단적인 사례가 경주(신라)에서 발견되는 토기와 전혀 다른 양식의 토기가 출토된다는 것.

학계가 ‘의성 양식토기’로 명명해 거론할 정도로 특이한 형태의 이 토기는 의성군 금성면을 기점으로 해 남쪽에는 군위, 서쪽은 상주와 예천, 북쪽으로는 안동·영주·봉화·청송에 이어 단양과 제천 일부 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당시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이 토기들은 낙동강 물길을 따라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 현상은 당시 조문국의 위세와 문화적 역량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생산력(경제)과 군사력 또한 막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의성이 지리적 조건(안계평야·낙동강)과 함께 생산력(인구 밀집도) 또한 만만찮았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산력(고대사회 기준)이란 인적·물적(먹거리) 요소, 지리적 위치(군사적 요충지), 군사적 방어시설을 가능케 하는 인구력 등의 다양한 조건들의 충족을 의미한다.

이를 토대로 살펴보면 당시 경주(사로국) 지역이 가진 지리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은 ‘선진 문물이 도입되는 북방(경북 북부지역)의 관문 역할을 하는 거점 도시의 확보’라는 데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일부 학자들은 의성지역이 가지는 생산력을 금 생산지로서의 경제적 능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경주(사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의성지역으로의 영향력 확대는 단순히 경제적 측면에만 머물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따라서 조문국이 가지는 의미와 그 위상은 신라가 영토 확장을 통해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과정에서 흡수된 고대왕국인 감문국(김천), 압독국(경산), 사벌국(상주), 이서국(청도), 우산국(울릉) 등과는 엄연히 차별된다.

◆‘정벌’이 곧 ‘멸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조문국은 과연 사로국의 강력한 군사력에 의해 완전히 멸망 당했을까. 삼국사기에는 ‘조문국은 서기 185년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 벌휴왕에 의해 정벌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주류 사학계는 이 대목을 ‘조문국은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관점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향토사학자와 일부 학자들의 견해는 다르다. 이들은 “특정 집단이 외부의 강력한 세력에 무릎을 꿇어 흡수·통합되는 과정을 통해 완전히 멸망됐을 것이라는 전제의 성립을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주장을 굽히지 않는 데에는 5~6세기에 조성된 금성면 일대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다양한 유물들이 있다. 이를 근거로 향토사학자들은 “조문국은 ‘멸망’당한 것이 아니라 신라와 대등한 위치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계속 유지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실제 이 시기에 조성된 고분에서 상당 부분 신라의 영향을 받은 유물이 발굴되고 있지만, 신라의 금동관과는 다른 형태의 금동관을 필두로 일상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토기 역시 신라와 전혀 다른 형태의 토기(의성 양식토기)가 부장품으로 출토됐다.

여기에다 교통망과 통신수단이 발달되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신라 군사가 금성면 일대에 상주해 해당지역을 직접 통치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다시 말해 당시 신라는 경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의 경우 관리를 파견한 직접 통치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호족 또는 토호세력에게 지배지역을 통치할 수 있도록 힘과 권위를 인정하는 ‘칼(환두대도)’을 하사하는 방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문국과 신라가 대등한 위치에서 정치·경제·문화 등의 교류가 이뤄진 전환점으로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이 같은 향토사학계의 입장은 지난해 10월 조문국 사적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다량의 유물 가운데 신라권역에서 출토된 사례가 없는 새로운 형식의 부장품이 발견되면서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백제 최상위 계층 무덤에서 출토되는 금동제 관모 발견

의성군은 당시 금성면 대리리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주곽과 부곽으로 구성된 봉토분 4기에서 금동제 관모 등 약 1천점의 유물을 공개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봉토분 4기에서 순장자와 함께 금동제관모, 금동제관식, 은제관식, 은제과대, 태환 및 세환이식, 유리경식, 은제규두대도, 삼엽문환두대도, 금동제행엽, 금동제안교 등 피장자의 신분이 당시 최상위임을 상징하는 유물이 다량 확인됐다.

이 가운데 특히 관심을 끄는 대목은 단위 유적에 대한 발굴에서 관모와 관식이 다량 출토된 예가 드문 데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당시 신라의 왕경인 경주를 제외한 신라권역에서 출토된 사례가 없는 새로운 형식의 금동제 관모가 경북 북부지역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다는 것. 이와 유사한 형식의 금동제 관모는 백제의 최상위 계층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번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당시 금성면 금성산을 중심으로 한 조문국의 후예들이 백제와 교류관계에 있었음은 물론 신라에 종속된 관계였다기보다는 독자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한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백제와의 교류를 의미하는 이 관모와 관식의 발견은 조문국이 신라에 의해 ‘정벌’당한 뒤 합병된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유지했을 가능성을 열어둔 사례 중 하나로 향토사학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의성=마창훈기자 topgun@yeongnam.com


공동 기획 : 의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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