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인터뷰] ‘대구경북 미식축구 대부’ 박경규 경북대 명예교수

  • 명민준,손동욱
  • |
  • 입력 2016-10-08  |  수정 2016-10-08 09:36  |  발행일 2016-10-08 제22면
“지역 첫 미식축구팀 창단땐 장비 없어 미군이 버리는 것 주워 사용했죠”
20161008
지난 4일 경북대에 위치한 자신의 연구실에서 박교수가 미식축구공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 공은 지난 2007년 한국대표팀이 제3회 미식축구월드컵에서 프랑스와 5∼6위전을 치를 당시에 사용했던 공이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미쳤다’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미식축구에 대한 열정이 그야말로 엄청나다. 박경규 경북대 명예교수(생물산업기계공학과) 겸 미식축구팀 감독(68)에 대한 얘기다.

40여년전, 서울대 재학시절에 미식축구 동아리에 들면서 박 교수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키 175㎝에 66㎏의 왜소한 체격을 극복하기 위해 틈만나면 계란을 먹어댔다. 부모 몰래 밤새도록 AFKN(주한미군 국내방송망)을 틀어놓고 NFL(미국프로미식축구) 중계를 봤다. 책상 위에서 공부를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노트엔 온통 미식축구 전략이 그려져 있을 정도였다.

대학교수가 되어서도 그의 열정은 변함없었다. 학생들을 하나둘씩 모아 미식축구팀을 꾸렸고, 사비를 털어 장비를 마련했다. 미식축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다른 대학에서도 팀을 창단할 수 있게끔 적극적으로 도왔다. 남들은 무모하다고 손가락질했지만, 그의 노력으로 대구·경북에는 10개의 대학 미식축구팀이 생겼다. 대구·경북 미식축구계는 이제 그를 ‘미식축구의 대부’로 부른다.

지난 4일 박 교수의 드라마틱한 미식축구인생을 듣기 위해 경북대 교수실을 찾았다.

20대의 노트엔 온통 미식축구 전략
밤새워 AFKN으로 중계경기 시청

교수 된 후도 열정은 전혀 식지 않아
경북대 등 지역 대학미식축구팀 산파

협회장시절 국제대회 첫승 기억남아



▶지금보다 과거에 더 불모지였을 텐데, 미식축구를 접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선친께서 서울대 농대 교수였다. 부모님도 교수가 되길 바라셨고, 나도 1966년에 서울대 농대에 입학했다. 당시, 서울대 농대 캠퍼스가 수원에 있었는데, 수원 캠퍼스에 서울대 미식축구팀의 근거지가 있었다. 대학생 때 멋진 선배들이 주변에 있지 않는가. 술도 잘마시고 덩치 큰 선배들은 대부분 미식축구부였다. 나도 그들과 같이 멋지게 되고 싶다는 생각에 미식축구팀에 들게 됐다. 그 시절엔 미국에 대한 동경심도 있었으니까 무조건 배우고 싶었다.”

▶미식축구가 굉장히 생소했을 텐데 처음부터 매력을 느낄 수 있었나.

“얼핏 보면 공을 갖고 몸을 부딪히는 굉장히 과격한 스포츠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작전이 조금만 틀어지더라도 경기를 진행할 수 없다. 작전을 잘 짜야 하고, 선수들과도 합이 맞아야지 이길 수 있다. 또 간단한 규칙만 알면 체격조건에 관계없이 어떤 사람이라도 즐길 수 있는 운동이다. 팀에 들어갈 당시 혈기왕성한 시절이었는데, 머리까지 써가면서 운동을 해야 했던 만큼 단숨에 매료됐다. 밤을 새가면서 AFKN을 통해 NFL 중계를 봤고, 강의 노트에 포메이션을 가득 그려놓기도 했다.”

▶미국인들과 직접 맞붙어 본 적이 있나.

“카추사 시절 미군들과 붙어봤다. 당시 전국에 산재한 주한미군 부대들이 미식축구팀을 만들어서 리그를 펼치고 있었다. 멤버를 뽑는다길래 바로 지원했다. 내 덩치로는 택도 없었는데, 당시 미군팀 감독이 내 프로필에 적힌 ‘서울대 미식축구팀’ 이력을 보고 오해했나 보다. 미국에서 대학미식축구팀의 위상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카추사 중에서 처음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군 공보부까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미군팀 감독도 어리둥절해 했지만 나를 입단시켜줬다. 그런데 운동장에서 미군들과 연습게임을 해봤는데 무슨 자동차와 부딪히는 줄 알았다. 정말 위험할 수 있겠다 싶어 매니저를 하겠다고 말했다. 매니저를 맡으면서, 그들의 전술을 직접적으로 본 계기가 됐다.”

▶미국에서도 미식축구경험이 있다고 들었다.

“1976년 28세에 경북대 농대 교수로 부임했다. 2년뒤 학교측의 배려로 가족들과 함께 미국 캔자스주립대로 유학길에 올랐다. 학교 운동장에서 미식축구팀원들이 훈련하는 것을 보고, 피가 다시 끓어 올랐다. 곧바로 운동장으로 향했고, 코칭스테프에게 양해를 구해서 매니저가 되겠다고 자처했다. 작은 동양인의 말이었지만, 내 진심을 알아봐준 것 같았다. 매니저로 그들과 소통하면서 미식축구의 진수를 제대로 맛볼 수 있었다.”

▶경북대 미식축구팀 창단 배경은.

“1980년대초 부산에서 과거 서울대 미식축구팀 시절 후배들과 만났다. 후배들이 부산의 대학에서 미식축구팀을 창단했다. 부럽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후배들이 나한테도 팀을 창단하라고 권유해 1983년 경북대 팀을 만들었다.”

▶창단 과정에 어려움은 없었나.

“공고를 붙였는데 생각보다 많은 학생이 몰려왔다. 문제는 장비였다. 카추사 시절이 떠올랐다. 미군측 지인에게 부탁해 미군팀이 장비를 교체하는 시즌을 알게 됐고, 그들이 버리는 장비를 수거해 다시 사용했다. 그런데 덩치 차이가 워낙 크다 보니 사이즈에 한계가 있더라. 그래서 장비에 적힌 AS 주소로 장비를 구입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붙였다. 수십통의 편지를 부치고, 몇개월이 지난 뒤 미국에서 답장이 왔다. 원하는 장비를 주문하라고 말이다. 당시에는 해외송금절차가 복잡했는데, 거금을 들여서 장비를 구입하게 됐다.”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2007년 대한미식축구협회장으로 일하던 시절이다. 한국대표팀이 제3회 미식축구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지역 최종예선전이 열린 호주에서 홈팀 호주를 22-13으로 꺾고, 국제대회에서 역사적인 첫승을 거뒀다. 한국팀은 그해 7월 일본 가와사키에서 열린 월드컵 본선에 출전했고, 프랑스를 3-0으로 누르고 6개국 중 5위를 차지했다. 그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

“미식축구팀 창단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 장비를 대신해서 구입해주고 있다. 장비 10개를 구입해달라고 하면 11개 비용을 받아 11개를 산다. 남는 장비 1개씩을 모아뒀다가 새로 창단하는 팀을 위해 지원해주곤 한다.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 만큼 미식축구의 저변도 넓어져서 더 많은 팀이 생겼으면 한다. 또 미식축구가 가져다주는 교육효과를 통해 많은 학생이 성공했으면 한다. 열심히 노력한다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어려운 일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우기를 바란다. 또 그간 모은 자료를 정리해 한국미식축구가 발전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져놓고 싶다.”

명민준기자 minjun@yeongnam.com

▨ 박경규 교수 약력

20161008

△1966년 서울대 미식축구부 입단 △1968년 서울대 우승 주전 △1971~1975년 서울대 미식축구부 선수 겸 코치 △1976년 경북대 교수(28세) △1978년 미국 캔자스주립대 공학박사 △1983년 경북대 팀 창단 △1986년 대구·경북협회 창단 실무 부회장 △1998년 국제 미식축구연맹 아시아 연맹회장 △2005년 KAFA 회장 △2006년 국제연맹 수석부회장 △2013년 2월 경북대학교 정년퇴임 이후 명예교수로 재직하면서 경북대팀 감독으로 지휘 중

기자 이미지

손동욱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사회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