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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락부락하고 거무튀튀한 살갗의 박창기 시인. 문학과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은 그의 삶은 간첩사건 등 시대와의 불화로 인해 시적으로 돌변했다. 21년 도반인 계간 시잡지 ‘시하늘’을 통해 민들레 홀씨 같은 좋은 시를 세상을 향해 퍼트리고 싶은 게 그의 여망이다. |
갓 일흔을 넘겼고 난 종일 성경 앞에서 서성거린다. 그렇다고 더 성스러워질 일도 없다. 생각해 보면 입신양명이란 얼마나 치명적인 구석이 있는가. 쭉정이 같은 허명이라도 챙기고 싶은 게 삶의 마지막 노욕(老欲) 아닐까. 도시로 향하는 욕망을 나름 다독거렸다고 했는데도 여전히 욕망의 밑불은 제압이 어렵다. 난 심심함과 논다. 하체의 근육이 심심할 때면 잠시 텃밭에 가서 푸성귀한테 물을 주고 들어온다.
산적두목. 그래 난 꼭 그렇게 생겨먹었다. 그래서 내가 시인이라고 하면 다들 눈이 휘둥그레진다. ‘당신이 무슨 시인’이란 뜨악한 표정이다. 그렇게 무시하지 마시라. 난 근육이 아니라 감성으로 사물을 포착한다.
내 삶은 흉터 가득하다. 남들은 잘도 피해갔던 ‘사람의 덫’에 자주 갇혔다. 그럴 때마다 증축된 흉터. 거기엔 ‘미움’만이 가득했다. 그 미움의 잣대로 세상을 맘대로 난도질했다. 남을 미워하는 것. 그건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었다. 내게 미움을 주는 존재가 결국 나밖에 없다는 것도 오랜 세월 뒤 자연스럽게 깨닫게 됐다. 미움은 나를 성찰케 하는 ‘거울’이었다. 그 미움 탓인지 난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시인이 될 수 있었다. 그 덫은 세월이 내게 준 ‘배려’였다.
박창기로 태어나 ‘박창기 시인’이란 말을 들을 수 있게 된 건 태어나서 44년이 지나서부터였다. 1990년 어느 날. 난 등단이란 절차도 거치지 않고 겁도 없이 첫 시집부터 출간했다. 다들 신춘문예에 당선되거나 문예지 신인상, 추천 등을 통해 등단하던 시절이었다. 난 시인 자격보다 시집 자체가 더 절실했다. 솔직히 심사를 통과해야 시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예상대로 아무도 날 알아주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시인 사이에도 서열이 엄존했다. 유명시인과 무명시인 사이에 엄청난 크기의 크레바스(crevasse, 빙하 속의 깊이 갈라진 틈)가 가로놓여 있었다. 시인 앞에 무명과 유명이란 수식어를 붙을 수 있단 말인가. 난 유명도 무명도 싫었다. 그냥 ‘자칭 시인’으로 살다 죽자고 다짐했다. 새로운 시집이란 게 별건가. 뭐랄까, 내 시의 변화를 가늠케 해주는 하나의 ‘반성문’이었다. 그러니 새 시집을 굳이 알릴 필요도 없었다. 남의 반응보다 내 반응이 더 중요했다. 지금껏 14권의 시집을 냈다. 그 시집은 날 성장시켜준 또 다른 ‘나이테’다. 그 시집을 순서대로 보관해주는 건 아내뿐이다. 아내가 유일한 독자라고나 할까.
어느 날부터인가 거리는 시인으로 흘러 넘쳤다. 하지만 시민들은 시와 멀어지고 있었다. 시인들만의 자화자찬이었다. 이 대목에 화가 났다. 그런 와중에 내게도 하나의 욕심이 생겼다.
시인이 아니라 시를 모르는 사람에게 ‘좋은 시’를 널리 보급해보고 싶었다. 익명의 소시민에게 향하는 시. 그건 ‘행복의 씨앗’이었다. 내 삶의 화두도 확실해졌다. 모든 사람들이 시심(詩心)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박창기의 삶이라고 믿었다. 1996년이었다.
손바닥만 한 계간 시잡지인 ‘詩하늘’. 솔직히 시하늘은 21년간 지속된 가장 믿음직한 ‘도반’이다. 이놈들은 내게 삶의 쓴맛과 단맛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남을 돕는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을 돕는 일 아닌가. 하지만 일이란 원래 자기 돈이 들어가야 제대로 굴러가는 법. 적잖은 돈이 내 주머니에서 흘러나갔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그 돈은 전생 빚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사는 변화난측의 연속이었다. 무지개로 다가왔다가 먹구름만 안겨주고 떠난 사람도 있었다. 디딤돌 같았던 사람이 걸림돌로 돌변한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익명의 후원자가 없었다면 시하늘은 사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시하늘을 들여다 보면 내 유년 최고의 놀이터였던 포항 송도해수욕장의 파도가 내 가슴속에서 출렁거린다. 오, 오뉴월이면 파란색과 흰색으로 극명하게 대비됐던 그 바다와 백사장, 그리고 그 경계를 핥고 지나가는 황홀한 해조음.
글=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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