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5] 안동 도산구곡(上)...陶山에 심신 의탁한 이황…조선 선비들 ‘구곡의 삶’으로 이끌다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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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12 08:09  |  수정 2021-07-06 14:58  |  발행일 2017-10-12 제21면
20171012
퇴계 이황이 소장하며 친필 발문 등을 남긴 ‘주문공무이구곡도’(영남대 박물관 소장). 주문공은 중국의 주자를 말한다. 이황은 이 무이구곡도를 수시로 감상하고 주자의 ‘무이도가’를 차운한 시도 지었지만, 직접 도산구곡을 설정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황이 이처럼 도산구곡을 설정하지 않음으로 해서 이황의 후학들인 영남학파 선비들은 율곡 이이의 기호학파와는 달리 늦게까지 구곡을 경영하지 않고 도산서원이 있는 도산 일대를 그린 도산도와 무이구곡도를 함께 소장하게 되고, 이것이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성호 이익(1681~1763)이 강세황에게 무이구곡도와 도산도를 그리게 한 사실도 그 예라 할 수 있다.

안동의 도산(陶山)구곡은 안동을 가로질러 흐르는 낙동강 상류(오천마을 부근~청량산 입구)에 설정된 구곡이다. 그 길이가 27㎞나 되는 매우 긴 구곡이다. 도산구곡은 퇴계 이황(1501~1570)이 도산서당을 짓고 머물렀던 도산에서 비롯된 구곡으로, 이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지만 이황이 도산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도산은 이황이 학문을 닦고 심신을 수양하던 거점이었다. 주자의 삶과 학문을 체현하고자 했던 공간이었다. 이황은 또한 무이구곡도를 비롯해 무이구곡 관련 자료를 가장 많이 구해 탐독하고 무이구곡가를 차운한 시도 지었다. 이황은 이처럼 주자를 흠모하고 그 행적을 따르고자 했지만, 주자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으로 생각했던지 자신이 머문 곳에 직접 구곡을 설정하여 경영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황이 ‘희작칠대삼곡시(戱作七臺三曲詩)’를 남긴 것을 보면 구곡경영과 구곡시 창작에 뜻을 두고 있었음을 읽을 수 있지만, 구곡경영까지는 나아가지 않은 것으로 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여기서 삼곡은 석담곡(石潭曲), 천사곡(川沙曲), 단사곡(丹砂曲)이다. 6도산구곡은 이황의 후손 문집에 등장한다. 이를 통해 이황 사후 200년 정도 지난 18세기 후반기에 도산구곡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이순(1754~1832)은 ‘유도산구곡경차무이도가운십수(遊陶山九曲敬次武夷櫂歌韻十首)’에서 도산을 무이구곡에 비유하면서 주자와 이황의 학문적 위업을 나란히 평가했다. 이황이 주자의 학문을 정통으로 계승했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황과 도산구곡

이황은 태어나고 자란 예안의 온혜리 일대를 비롯해 독서와 사색의 장이었던 청량산, 노년에 머물렀던 도산이 그 삶의 중심지였다.

이황은 온혜리에서 태어나 그 인근에서 40대 후반까지 살았다. 숙부 이우(1469~1517)의 훈도를 받던 소년시절부터 청량산을 왕래하며 독서에 열중했으며, 34세에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간 이후 49세 때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했다. 50대 초반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53세에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이후에도 관직이 주어졌으나 사퇴하고 예안으로 돌아와 저술과 강학에 전념하며 말년을 보냈다.

이황은 50대를 한서암(寒棲庵)과 계상서당(溪上書堂)에서 보내다 다시 은거할 곳을 물색, 도산의 남쪽 땅인 지금의 도산서원 자리를 찾아 도산서당을 짓기 시작했다. 이황은 서당의 규모와 구조, 건물 배치 등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5년 만인 1561년에 완공을 보았으며, 이곳에서 말년 10년을 보내다 생을 마감했다.


안동의 낙동강 상류 27㎞ 계곡
이황 도산서당 짓고 말년 은거
주자의 삶·학문 체현하던 공간
자신이 직접 ‘구곡’ 설정 안 해
死後 후손이 무이구곡에 비유



이황은 사색과 독서의 장이었던 청량산이 아니라 왜 도산을 선택했을까. 이황은 청량산이 험준한 산이라서 늙고 병약한 자신이 즐겨 다니기에 힘겨웠고, 또 청량산 안에는 물이 없어 산수를 좋아하는 자신의 심신을 의탁하기에 어려웠다는 점을 도산잡영병기(陶山雜詠幷記)에 밝힌 바 있다.

이황이 도산에서 보낸 삶은 주희의 무이구곡 삶과 흡사한 점이 많다. 도산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 지은 도산잡영병기는 주희가 무이정사에서 남긴 무이정사잡영병서(武夷精舍雜詠幷序)와 유사하다. 거처를 정하게 된 동기, 주변 경물의 선정과 이름을 붙이는 방식을 보면 이황이 주희와 무이정사를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이황이 자신이 머물던 장소에 구곡을 정하고 이름을 붙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가. 이에 대해 이황 자신이 구곡을 직접 설정하는 것은 주자를 존모하는 태도에 역행하는 행위로 인식했거나 도산서당 주변의 지리적 환경 등 때문인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황의 무이도가 차운시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차운하여 시를 짓고,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를 감상하고 ‘무이지(武夷志)’를 읽고 무이구곡을 상상하는 조선 선비들의 본격적 삶은 이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황은 어느 날 ‘무이지’를 읽고 ‘무이도가’를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이 시의 제목은 ‘한거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십수(閒居讀武夷志次九曲櫂歌韻十首)’인데, 풀이하면 ‘한가롭게 지내면서 무이지를 읽고 구곡도가를 차운한 10수’이다. 시의 제목에서 이 시가 어떻게 지어졌는가를 알 수 있다.

여기서 ‘무이지’는 중국 무이 지방의 풍물을 기록한 책이다. 물론 무이산과 무이구곡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실려 있다. 이황은 이 책을 읽고 상상 속에서 무이구곡을 유람하고 그 감회를 주자의 무이도가 형식을 따라 시를 읊은 것이다. 이황이 지은 구곡시의 대상은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강산이 아니라, 그 옛날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구곡이었다. 주자를 따라 무이구곡을 읊은 이황의 시(한시 번역)다.

‘선산(仙山)은 이령(異靈)을 자랑하지 않고/ 창주의 유적은 맑기만 하다/ 지난 밤 꿈의 감격 때문에/ 구곡가 운을 빌려 다시 노래하네// 일곡에서 고깃배를 찾아 오르니/ 천주봉은 예와 같이 의연히 서천을 굽어보네/ 한 번 진유(眞儒·주희)가 음상(吟賞)한 후로는/ 동정(同亭·도교 전설 어린 정자)에 다시 풍연을 관장함이 없어라// 이곡이라 선녀가 변한 푸른 봉우리/ 아름답고 빼어나게 단장한 얼굴이네/ 다시는 경국지색 엿보지 않노라니/ 오두막에 구름이 깊고 깊게 드리우네// 삼곡이라 높은 벼랑에 걸린 큰 배/ 공중을 날아와 걸린 그 때 일 괴이하다/ 내를 건넘에 마침내 어떻게 쓰였을까/ 오랜 세월 헛된 번뇌 귀신 보호 가련하구나// 사곡이라 선기암(仙機巖)은 밤이 되어 고요한데/ 금계가 새벽 되니 날개 치며 새벽 알리네/ 이 사이에 다시 풍류가 있으니/ 양구 걸치고 월담에 낚싯줄 드리우네// 그 때 오곡 산 깊이 들어가니/ 대은이 도리어 수풀 속에 은거하셨네/ 요금(瑤琴)을 빗겨 안고 달밤에 타노라니/ 산 앞의 삼태기 맨 사람 이 마음 알겠는가// 육곡이라 푸른 옥빛 물굽이 둘러 있고/ 신령한 자취는 어디인가 구름 관문뿐이로다/ 꽃잎 떠 있는 물길 따라 깊은 곳 찾아오니/ 비로소 알겠네 선가의 한가로움을// 칠곡이라 노를 잡고 또 한 여울 오르니/ 천호봉의 기이한 풍경 가장 볼만하네/ 어찌하면 신선이 마시는 유하주를 얻어서/ 취하여 비선(飛仙)을 따라 학의 등에 오르려나// 팔곡이라 구름 걷히니 호수가 열리고/ 표연히 노에 맡기고 물 위를 선회하네/ 고루암은 조물주의 뜻을 알아서/ 나그네를 불러서 끝까지 찾아오게 하네// 구곡이라 산 열리니 눈앞이 확 트이고/ 사람 사는 마을 긴 하천 굽어보네/ 그대는 이것을 유람의 끝이라 말하지 말라/ 묘처(妙處)에 반드시 별천지가 있으니’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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