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7] 고산구곡(上)...“高山에 집지어 사니 벗님들 다 오네…武夷 생각하고 朱子 배우리라”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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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09 07:58  |  수정 2021-07-06 14:59  |  발행일 2017-11-09 제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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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237호로 지정된 고산구곡도 그림 중 김홍도가 그린 1곡 관암도(왼쪽)와 이의성이 그린 9곡 문산도. 12폭으로 된 이 고산구곡도시화병에는 구곡 그림과 함께 이이의 고산구곡가, 송시열의 고산구곡가 한역시 등이 함께 실려 있다.

조선시대의 무이구곡은 누구도 가 보지 못한 곳이었기에 그 의경(意境)은 상상 속에서만 떠올려야 했다. 그러한 동경을 해소해 준 것이 바로 ‘무이구곡도’였다. 무이구곡도는 주자학(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기반이 마련된 16세기부터 조선에 들어왔다. 이후 지식인들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조선 말기까지 변용과 확산의 과정을 거치며 널리 감상되었다. 17세기에 이르면 무이구곡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서 벗어나 개인의 은거처에 구곡을 조성하는 사례가 등장한다.

무이구곡을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머문 현실 공간 속에 직접 구곡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러한 구곡 경영은 주자의 학자적 삶을 적극 계승하는 방편으로 여겨졌다. 이는 조선구곡의 조성과 조선식 구곡도가 등장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나아가 독창적인 조선의 구곡문화가 태동하는 토대가 되었다.

조선구곡의 본격적인 서막은 율곡 이이(1536~1584)가 은거의 공간으로 조성한 고산구곡(高山九曲)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퇴계 이황과 달리 율곡 이이는 직접 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했다. 고산구곡은 조선의 선비가 직접 구곡을 경영한 초기 사례 중 하나이다.


율곡 이이 ‘구곡 직접경영’ 서막 열어
처가가 있는 황해도 해주 고산에 은거
청계당 짓고 동편엔 은병정사도 마련
漢詩 아닌 한글 시조로 계곡절경 읊어



이이는 1569년 교리(校理)에서 물러나 황해도 해주에 머문다. 해주는 이이의 처가가 있는 곳이다. 2년 뒤인 1571년에는 해주에 있는 산인 고산의 석담리(石潭里)를 탐방하고, 계곡의 아홉굽이에 이름을 붙인 뒤 은거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이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고산구곡을 자주 찾지 못했다. 관직의 임기를 마친 뒤 잠시 휴가를 보내고자 한시적으로 왕래했을 뿐이다.

이이가 정하고 이름 붙인 구곡은 제1곡 관암(冠巖), 제2곡 화암(花巖), 제3곡 취병(翠屛), 제4곡 송애(松崖), 제5곡 은병(隱屛), 제6곡 조협(釣峽), 제7곡 풍암(楓巖), 제8곡 금탄(琴灘), 제9곡 문산(文山)이다.

그 후 이이는 2년간의 해주 관찰사직을 마친 1576년에 고산구곡으로 돌아가 기거할 거처로 청계당(聽溪堂)을 세웠다. 2년 후인 1578년(43세)에는 청계당 동편에 정사를 짓고 은병정사(隱屛精舍)라 이름을 붙였다. 주자가 무이구곡 5곡을 굽어보는 은병봉 아래 무이정사를 지은 것을 본받은 것이다. 이렇게 고산구곡에서 본격적으로 은거할 준비를 마쳤지만, 오래 머물지 못했다.

그리고 이이는 1578년 은병정사를 짓고 은거하면서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를 본떠서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고산구곡가는 한글로 지은 시조 형식의 시다. 이이가 고산구곡을 조성한 것은 고산구곡가 서시에서 밝혔듯이 주자의 무이구곡을 생각하고 주자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은 주자의 성리학을 국시로 했고, 이이 역시 주자의 가르침과 삶을 흠모하며 그를 본받으려 했다. 이이는 사람들이 고산 계곡의 뛰어난 경치를 모르는 것도 안타까웠지만,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고산구곡가를 지은 것은 아니다. 그 바탕에는 주희의 무이구곡과 무이도가 등이 있었던 것이다.

◆이이의 고산구곡가

이이의 고산구곡가는 다음의 서시로부터 시작된다. 현대어로 바꾸고 그 해설문을 함께 덧붙인다.

‘고산구곡담(高山九曲潭)을 사람이 모르더니/ 주모복거(誅茅卜居)하니 벗님네 다 오신다/ 어즈버 무이(武夷)를 상상(想像)하고 학주자(學朱子)를 하리라’(고산 구곡담을 사람들이 모르더니/ 풀을 베고 집 지어 사니 벗님들 다 오는구나/ 아아, 무이를 생각하고 주자를 배우리라)

‘일곡(一曲)은 어디인가 관암(冠巖)에 해 비친다/ 평무(平蕪)에 안개 걷히니 원근(遠近)이 그림이로다/ 송간(松間)에 녹준(綠樽)을 놓고 벗 오는 양 보노라’(일곡은 어디인가 갓바위에 해 비친다/ 들판에 안개 걷히니 원근이 그림같이 아름답구나/ 소나무 숲속에 술통 놓고 벗들 오는 모습 보노라)

‘이곡(二曲)은 어디인가 화암(花巖)에 춘만(春晩)하구나/ 벽파(碧波)에 꽃을 띄워 야외(野外)에 보내노라/ 사람이 승지(勝地)를 모르니 알게 한들 어떠리’(이곡은 어디인가 꽃바위의 늦봄 경치로다/ 푸른 물결에 꽃을 띄워 멀리 들판으로 보내노라/ 사람들 경치 좋은 이곳을 모르니 알게 하여 찾아오게 한들 어떠리)

‘삼곡(三曲)은 어디인가 취병(翠屛)에 잎 퍼졌다/ 녹수(綠樹)에 산조(山鳥)는 하상기음(下上基音) 하는 적에/ 반송(盤松)이 수청풍(受淸風)하니 여름 경(景)이 없어라’(삼곡은 어디인가 푸른 병풍 같은 절벽에 녹음이 짙어졌도다/ 푸른 숲에서 산새들 아래위로 지저귀는 때에/ 반송이 맑은 바람에 흔들리니 여름 풍경 이에 더 없어라)

‘사곡(四曲)은 어디인가 송애(松崖)에 해 넘는다/ 담심암영(潭心岩影)은 온갖 빛이 잠겼어라/ 임천(林泉)이 깊을수록 좋으니 흥(興)을 겨워 하노라’(사곡은 어디인가 소나무 벼랑 위로 해 넘어간다/ 물 속의 바위 그림자 온갖 빛과 함께 잠겨 있구나/ 숲속 샘은 깊을수록 좋으니 흥에 겨워 하노라)

‘오곡(五曲)은 어디인가 은병(隱屛)이 보기 좋다/ 수변정사(水邊精舍) 소쇄(瀟灑)함도 가이없다/ 이 중에 강학(講學)도 하려니와 영월음풍(詠月吟風)하리라’(오곡은 어디인가 병풍바위 보기도 좋다/ 물가에 세운 집 깨끗하기 그지없구나/ 이런 곳에서 글도 가르치고 시를 지어 읊으며 풍류도 즐기리라)

‘육곡(六曲)은 어디인가 조협(釣峽)에 물이 넓다/ 나와 고기와 누가 더 즐기는가/ 황혼(黃昏)에 낙대를 메고 대월귀(帶月歸)를 하노라’(육곡은 어디인가 낚시하는 골짜기에 물이 많구나/ 나와 고기 어느 쪽이 더 즐기는가/ 황혼에 낚싯대 메고 달빛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리라)

칠곡(七曲)은 어디인가 풍암(楓巖)에 추색(秋色)이 좋다/ 청상(淸霜)이 엷게 치니 절벽이 금수(錦繡)로다/ 한암(寒岩)에 혼자 앉아서 집을 잊고 있노라’(칠곡은 어디인가 단풍 덮인 바위에 가을빛이 좋구나/ 맑은 서리 엷게 내리니 절벽이 비단 빛이로다/ 차가운 바위에 혼자 앉아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잊고 있노라)

‘팔곡(八曲)은 어디인가 금탄(琴灘)에 달이 밝다/ 옥진금휘(玉軫金徽)로 수삼곡(數三曲)을 탄 것을/ 고조(古調)를 알 이 없으니 혼자 즐겨 하노라’(팔곡은 어디인가 거문고 소리 들리는 듯한 여울에 달이 밝다/ 빼어난 거문고로 서너 곡조 탓지만/ 옛 가락을 알 사람이 없으니 혼자서 즐기노라)

‘구곡(九曲)은 어디인가 문산(文山)에 세모(歲暮)구나/ 기암괴석(奇岩怪石)이 눈속에 묻혔어라/ 유인(遊人)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없다 하더라’(구곡은 어디인가 문산에 해 저문다/ 기이한 바위와 돌들이 눈 속에 묻혔구나/ 세상 사람들 찾아와 보지도 않고 볼 것 없다 하더라)

고산구곡가는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무이도가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 이황의 경우가 그렇듯이 거의 한시로 차운(次韻)을 한 것과 달리, 시조의 형태로 지었다는 점에서 각별히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주자의 무이도가를 본떠 지었으나 시상(詩想)에 있어 독창적인 면이 엿보인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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