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11] 봉화 춘양구곡(上)...봉화 운곡천 9㎞ 굽이굽이마다 ‘구곡’…선비들 은거 정자 중심으로 설정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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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04 07:54  |  수정 2021-07-06 15:01  |  발행일 2018-01-04 제22면
봉화 녹동마을 은거 경암 이한응
성리학 공부하고 제자양성 주력
옥천 조덕린 2곡에 지은 사미정
후세에 영남사림 학습장소 역할
20180104
춘양구곡 중 2곡의 중심인 ‘사미정(四未亭)’. 사미정은 옥천 조덕린이 지어 은거한 정자다(작은 사진). 사미정에서 바라본 사미정계곡.


봉화는 깊은 산골이지만 선비들의 숨결이 곳곳에 남아있는 고장이다. 운곡천(雲谷川)은 그 숨결이 스며있는 대표적 하천이다. 운곡천은 태백산 줄기인 문수산(1천206m), 옥석산(1천242m), 각화산(1천177m) 등에서 발원해 춘양면 서벽리와 애당리를 적시고, 법전면 소천리를 거쳐 명호면 도천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춘양구곡은 경암(敬巖) 이한응(1778~1864)이 운곡천 9㎞에 걸쳐 설정하고 경영한 구곡이다. 이한응은 서예와 시문에 뛰어났으며, 법전면 녹동마을에 있는 계재(溪齋)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며 제자 양성에 주력했다. 이한응의 학문은 오로지 경(敬)에 있었다. 그는 성인(聖人)과 광인(狂人)의 구분은 단지 경과 일(逸)에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경을 중시해 자신의 호도 경암이라 지었다.

◆선비들이 은거한 정자 중심으로 구곡 설정

춘양구곡은 앞서간 학자들이 은거한 정자나 정사가 있는 굽이를 중심으로 설정했다. 깊은 오지임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의 도가 면면히 전해 내려오는 것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려 한 것이다.

‘춘양은 신령한 골짜기와 맑은 시내를 가졌다. 춘양의 물은 태백산 서남 두 계곡으로부터 흘러오다가 남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합해져 수백 리를 흐른다. 태백산은 신령하고 빼어남이 충만한데 춘양이 그 중심에 있음으로써 그윽하고 깊을 뿐만 아니라 시내가 흐르면서 가경을 이루고 있다.’

이한응은 ‘춘양구곡시’ 서문에서 이렇게 운곡천 주변의 자연환경을 이야기한 뒤 “우리 현은 비록 처한 곳이 궁벽하나 덕이 높은 유현이 많이 이어나고, 우아한 풍절은 성대하게 세상의 희망이 되는지라, 이미 각각 장수(藏修)하는 임학(林壑)과 평장(平章)하는 수석(水石)이 은구(隱求)와 양진(養眞)의 장소가 되었으니, 이것은 그 산과 물의 만남이 진실로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 때문에 춘양의 산수가 세상에 이름난 것이 이미 오래다. 그 유풍과 여운이 아직 사라지지 않으니 내가 볼 수 있고, 이제 또 공허한 저 계산(溪山)의 토구(중국 노(魯)나라 고을 이름으로 은거처를 뜻함)는 정히 두보 선생이 말한 ‘문조(文藻)는 비웠다’는 것이다. 이제 내가 퇴락하여 은거함에 매번 서호의 꿈이 있었으나 심중을 토로할 길이 없었다. 이에 어은(漁隱)에서 도연(道淵)까지 구곡을 정하고 삼가 무이도가 운에 차운해 각각 한 장을 짓고, 장난삼아 여러 명사에게 주어서 서로 화운하게 하여 춘양의 산수고사(山水故事)를 삼는다”며 구곡을 설정하고 시를 짓는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서호의 꿈(西湖之夢)’은 중국 항저우 서호에서 평생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여기는 ‘매처학자(梅妻鶴子)’로 은거하며 살다 간 송나라 시인 임포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경암은 춘양이 비록 외진 고을이나 학덕이 높은 선비를 많이 배출하고 풍속과 예절이 우아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고을이라 했다. 성리학의 도가 구현되는 공간이고, 그래서 은구와 양진의 장소가 되는 곳이라는 것이다. 실제 춘양구곡은 굽이마다 덕이 높은 선비가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친 유적이 남아있다. 아홉 굽이를 설정하고 거슬러 올라가며 구곡시를 지은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춘양구곡이 평범한 공간이 아니라 성리학의 도가 전개되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담아낸 것이다.

춘양구곡은 1곡 어은(漁隱), 2곡 사미정(四未亭), 3곡 풍대(風臺), 4곡 연지(硯池), 5곡 창애(滄崖), 6곡 쌍호(雙湖), 7곡 서담(書潭), 8곡 한수정(寒水亭), 9곡 도연서원(道淵書院)이다.

◆이한응의 춘양구곡시

이한응은 춘양구곡시 서시에서 이렇게 읊는다.

‘태백산 남쪽은 맑고 신령스러우니/ 발원(發源)이 어찌 청결하지 않겠는가/ 춘양의 평평한 들판에 구불구불 흘러서/ 굽이마다 구역을 이루어 대대로 도가(櫂歌) 소리 있네.’

태백산의 맑고 신령한 기운을 받은 물이 흘러와 춘양의 들판을 흘러가며 아홉 굽이를 이룬 곳에 덕 높은 선비들이 깃들어 살면서 학문을 닦았으니, 어찌 주자의 무이도가 소리가 대대로 이어지지 않겠는가라고 노래하고 있다.

춘양구곡의 1곡은 어은이다. 법전면 어은리에서 한참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운곡천에 있다. 사미정 골짜기에서 내려갈 수도 있고, 명호면 쪽에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어은에 이르면 계곡과 산이 어우러져 절경이 펼쳐진다.

‘일곡이라 적연은 배 띄울 수 있으니(一曲笛淵可以船)/ 옥순봉 아래에서 어천으로 들어가네(玉荀峰下注漁川)/ 유선이 한 번 떠난 뒤로 찾는 사람 없으니(儒仙一去無人訪)/ 그 발자취 부질없이 무학봉 운무에 남아 있네(芳空留舞鶴烟).’

이한응은 주석에서 ‘적연 위의 석봉을 옥순봉이라 한다. 눌은 이광정이 정자를 지어 어은정이라 했다. 북쪽 언덕에 무학봉이 있다’고 적었는데, 정자는 사라지고 없다. 옥순봉이나 무학봉이란 명칭의 봉우리 이름도 지금은 없다고 한다.

2곡 사미정은 어은에서 1㎞ 정도 올라가면 나온다. 시내가 넓어지며 물이 천천히 흐르는 곳이다. 이 굽이의 바위 언덕 위에 사미정이 날아갈 듯이 앉아있다. 요즘은 이 주변의 계곡을 ‘사미정계곡’이라 부른다.

사미정은 옥천(玉川) 조덕린(1658~1737)이 말년에 지은 정자다. 조덕린은 1691년 문과 급제 후 사관·교리 등을 거쳐 동부승지에 올랐으나 당쟁에 휘말려 여러 번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1725년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거세져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소를 올리자 영조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보냈다. 조덕린은 이때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면 사미정을 지을 것을 계획했다.

“내가 종성에 유배된 지 3년, 그해가 정미가 되고 그해 6월이 정미가 되고 그달 22일이 정미가 되고 그날 미시가 또 정미가 되었다. 이런 날을 만나면 무릇 경영하는 자는 꺼리지 않았고, 음양가는 이런 날을 존중해 만나기 어렵다고 여겼다. 내가 이때 중용을 읽다가 공자의 말씀에 ‘군자의 도가 4가지인데 나는 그중에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고 하는 데 이르러 책을 덮고 탄식하여 ‘성인은 인륜이 지극한데도 오히려 능하지 못하다 하는데 우리들은 마땅히 어떠한가’라고 토로했다. 마침 이런 일시를 만나 한 움집을 지어서 살려고 생각하며 ‘사미’라고 이름 지었다.”

조덕린의 ‘사미정기’ 내용이다. 조덕린의 이런 정신은 후세에 이어지고, 사미정은 영남 사림의 공부 장소가 되었다. 정자 처마에 걸린 현판 ‘사미정(四未亭)’과 정자 안 현판 ‘마암(磨巖)’의 글씨는 번암 채제공(1720~1799)의 친필이라고 한다.

사미정에서 보는 운곡천 계곡은 울창한 숲과 바위, 맑은 물이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자랑한다.

‘이곡이라 옥천 시냇가 산봉우리(二曲玉川川上峰)/ 그윽한 초당에서 마주하니 사람 얼굴 같네(幽軒相對若爲容)/ 갈아도 닳지 않는 너럭바위 위로는(磨而不盤陀面)/ 천고에 빛나는 밝은 달빛이 비치네(千古光明月色重).’

이한응은 사미정 굽이에서 정자 주인공인 조덕린을 그린다. 옥천은 조덕린의 호이면서 운곡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유헌(幽軒)은 사미정을 말한다. 산봉우리는 조덕린 모습 같고, 너럭바위처럼 변하지 않는 조덕린의 덕은 밝은 달빛처럼 영원하다고 노래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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