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의 스토리 오브 스토리. 4] 고난의 역사와 비루한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 최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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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14   |  발행일 2019-02-14 제22면   |  수정 2019-02-20
비참한 삼류인생 이야기 ‘열등의 계보’, 문학지형 흔들었다
20190214
일러스트=최은지기자 jji1224@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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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살의 철학과 대학생이 한국 현대사 100여 년을 배경으로 제3회 한경 청년신춘문예 당선작을 썼다. 2015년의 일이고 작가는 홍준성, 소설의 제목은 ‘열등의 계보’다. 제목이 알려주듯이 그 내용은 내세울 것 없는 자들의 이야기다. 작품 구절을 인용하자면 ‘따까리 인생’에 대한 기록이자 인생무상의 이야기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어떻게든 그 무언가가 되고자 했던 따까리 인생들의 몸부림과, 그들을 휘감던 역사와, 내 것 아닌 수많은 욕망들”(333쪽)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소개하면 작품이 대단히 무겁고 암울하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사실은 정반대다. 서술자, 작가의 입담 덕으로 이 소설은 매우 재미있게 읽힌다.

스물다섯 대학생 홍준성의 작품
1910년∼2010년대 격변의 시기
보잘것없는 다섯세대의 삶 다뤄
무겁고 암울한 현실 재밌게 풀어
리얼리즘 문학의 비장함과 무관
장편소설의 새로운 감수성 제시


이른바 삼류 인생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이러한 소설은 우리 소설사에서 매우 드물다. 일단 ‘따까리 인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 자체가 많지 않다. 하층민의 삶을 폭로하는 목적을 가진 사회소설로 분류할 만한 단편들을 빼면, 보잘것없는 인생을 사는 인물이 장편소설의 긴 서사를 끌어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렇게 드문 주인공을 내세우면서 재미있게 읽힌다는 조건까지 충족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근래의 작품으로는 은희경의 ‘마이너리그’(2001)와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2003),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2015) 정도가 여기 해당된다.

삼류 인생을 다룬 재미있는 소설이 드문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일반적인 이유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학작품이란 내용과 형식이 함께 어울리게 마련이어서, 암울한 이야기라면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띠고 밝고 명랑한 내용이라면 경쾌한 호흡을 보인다. 이런 것을 뒤집는 장편소설은 풍자문학이나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이 아니면 찾기 어렵다. 반대로, 밝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무겁고 어둡게 전개하는 경우는 원리적으로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한편 보잘것없는 주인공을 재미있게 다룬 장편소설이 드물다는 사실의 구체적인 이유는 한국문학사의 특징에서 찾아진다. 이제 100년이 넘어가는 한국 현대소설의 주된 흐름은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리얼리즘이다. 이러한 리얼리즘문학이 사회 문제를 조명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통로로 기능해 온 탓에, 우리나라의 현대문학은 한국 현대사와 마찬가지로 암울하고 진지하며 엄숙하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삼류 인생을 재미있게 다룬 장편소설의 등장은, 우리 시대의 감수성 혹은 문화의 지형이 바뀌고 있다는 의미 있는 신호라고 할 만하다. ‘열등의 계보’를 주목해 봐야 할 이유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김무, 김성진, 김철호, 김유진으로 이어지는 네 세대이다. 김무의 부친이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잃은 데 항의하다 수감과 폭행을 당하고 화병으로 사망한 이야기까지 보태면 다섯 세대 130년 가까운 시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김무는 기울어진 집안형편 때문에 1933년에 하와이의 사탕수수 노동자로 조국을 떠나 우여곡절이 많은 삶을 살다 사람을 죽이고 자살한다. 하와이에서 태어나 광복과 더불어 귀국한 김성진은 이승만 계열의 깡패 조직인 부산애국청년회에 들어갔다 도주하고, 군인으로 6·25전쟁의 전장을 누비다 불구자가 되어 양공주의 딸인 영화와의 사이에 철호를 얻고는 가출하여 행방불명이 된다. 김철호는 어머니가 사채업자에게 몰려 몸을 팔다 자살한 이후 철거 용역 업체를 운영하는 두한의 밑에서 깡패로 지내다 살인을 하고 그 대가로 잠시의 평온을 누리다 IMF 환란 때 재산을 날리고 끝내 자신도 살해되고 만다. 철호와 미나의 딸인 유진은 외할아버지 밑에서 커서는 대학 국문과를 다니다 휴학해 자신의 뿌리를 찾아 나선다. 부친의 납골당을 계속 찾은 끝에 할아버지 김성진을 만나 집안의 내력을 전해들은 유진이 그것을 소설로 쓴 것이 바로 ‘열등의 계보’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토지조사사업에서 현재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 100여 년을 시간 배경으로 한다. 식민지시대의 암울한 현실과 하와이 이주 노동자의 비참한 상태, 이승만 정권하의 부패와 6·25전쟁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참상, 4·19와 5·16의 격동기, 철거민들을 몰아대는 군사독재 시절의 폭력, 버블 경제와 IMF, 그리고 청년들의 미래가 지워진 2010년대 오늘의 상황 등이 두루 망라되고 있다. 말 그대로 다사다난한 이 시기에, 살아가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것들을 했을 뿐인데도 파탄으로 내몰리게 되는 ‘따까리 인생’들의 삶을 김씨 집안을 통해 그려 보인다. 이들 삶의 비참함은, 깡패에서 국회의원으로 출세(?)하는 유 계장 부자의 이야기와, 일제 때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독재치하에서는 언론인으로서 고통을 감내하는 정씨의 이야기에 대비되면서 한층 부각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비참한 이야기를 홍준성은 매우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이 소설은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사는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으로 시작되지만, 곧바로 작가-서술자는 “어허 독자들이여,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니 (중략) 막걸리 서너 잔에 이야기보따리를 쏟아낼 나에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일 것이다”(9쪽)라고 너스레를 떤다. 이러한 너스레의 바탕에는 인생사에 대한 아주 평범한 지혜가 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다는 것, 우리네의 사람살이가 다 그러해서 인생은 무상하다는 것이 작가가 보이는 지혜다. 이렇게 평범한 지혜를 바탕으로 하는 까닭에, 작가-서술자가 나서서 이야기를 구절구절 설명하거나 의미를 부여하곤 해도 전혀 교설적이지 않다. 여기에, 비속함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입담 좋게 전체 스토리를 풀어내는 작가의 서술전략이 가해져 재미를 주고 있다.

20대 중반의 대학생 작가가 보인 이러한 역량은 무엇을 알려 주는 것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 소설의 위상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열등의 계보’는 전쟁을 다루되 전쟁문학의 이데올로기와는 거리를 두고 있으며, 조폭의 삶을 그리지만 수많은 조폭 영화 및 드라마가 보이는 액션 자체의 재미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 식민지 시대의 사상 탄압과 광복기의 혼란상을 담기는 해도 리얼리즘소설의 비장함과는 무관하다. 양공주와 혼혈아를 등장시키지만 예컨대 윤정모의 소설과는 달리 가볍고 경쾌하다. 온갖 불륜이 그려지지만 에로 문학과도 막장 드라마와도 달리 그 자체가 독립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보면 ‘열등의 계보’는 분명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비참하게 살다간 수많은 무명씨들을 기리는 새로운 감수성의 산물이라 할 것이다. 새로운 감수성이란 무엇인가. 불행한 역사와 비루한 삶을 주목하되 스스로는 그러한 불행과 비루함으로부터 한 발을 뺄 줄 아는 감각이 그것이다. 따라서 골치 아픈 현실로부터 한 발 떨어진 곳에 서서 그러한 현실을 탐구하는 새로운 태도의 산물이 바로 ‘열등의 계보’라 할 것이다. 현실의 문제로부터 한 발 떨어져서는 그러한 거리 감각을 재미를 낳는 데 쓰면서 현실을 탐구하는 새로운 방식을 선보인 것, 이렇게 한국 현대소설의 무거움은 떨쳐버리되 현실 탐구 정신은 이어받은 점이 이 소설의 장점이자 특징이다. 이러한 소설의 등장은 두 가지를 알려 준다. 어깨의 힘을 빼고 과거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의 연륜이 깊어졌다는 사실이 하나요, 현실을 탐구하는 소설의 기능이 당장 사라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다른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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