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준의 정원 인문학] 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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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06   |  발행일 2019-12-06 제40면   |  수정 2019-12-10
언덕 위 神의 도시에 숭배의 나무숲 조성 ‘성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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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출처 Christophe Meneboeu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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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출처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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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이 아테네 근교 짐나지움에 세운 아카데미 유적. <출처 Wikimedia>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1100년경부터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한 기원전 146년까지의 시대를 일컫는다. 그리스는 지중해 발칸반도 남단을 본토로 하여 동쪽의 에게해와 서쪽의 이오니아해의 수많은 섬이 자리 잡은 지중해 중심의 해양국가이다. 또한 그리스 본토인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평균 해발 600m의 고지대를 지붕으로 한 산악국가이기도 하다. 산맥으로 나눠진 골짜기나 해안의 오목한 분지마다 독립된 도시들이 발달하였고 이들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처럼 폴리스(Polis)라 불리는 도시국가를 형성하였다. 이는 전 국토의 70% 이상이 산지요, 반도 지형인 한국과 유사한 환경이라 하겠다. 그래서일까. 그리스와 한국 모두 역사와 신화는 산에서 시작하고, 신의 영역인 하늘과 인간 세계인 땅 사이에 자리 잡은 산을 숭상하는 문화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 神·인간 교감하는 ‘성림’
녹음 풍성한 짐나지움 청년 체육활동
지중해 태양 피하려 심은 플라타너스
정원 그늘로 학자들 몰려 철학의 꽃
건물 둘러싸인 아고라, 상업·사교 場

아도니스 사랑 쟁취하기 위한 두 여신
비극결말 허무한 사랑 꽃말‘아네모네’
여성들이 가꾼 개인 정원 ‘아도니스 원’


고조선의 건국 신화인 단군 신화에서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 세상에 뜻을 두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 신들의 도시인 신시(神市)를 세운다. 그리스 신화는 반도 북쪽의 가장 높은 산인 올림포스산(Olympus·해발 2천919m)의 도데카테온(Dodecatheon), 다시 말해 산 정상 ‘올림포스 12신’들의 도시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형세 좋은 산마다 산신(山神)을 두고 있듯이 고대 그리스의 도시마다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를 수호신으로 삼고, 일상 생활공간에서 구분된 높은 언덕 위에 신들의 도시인 아크로폴리스(Acropolis)를 건축하였다. 그리스의 각 도시국가들은 대소사를 신에게 묻는 신탁통치를 통해 공동체를 결속해왔다.

다신교 사회인 그리스의 신들은 공통으로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신들의 으뜸이 되는 올림포스의 12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이 제우스를 중심으로 각자 직분과 특수한 능력을 갖추고 있기는 하나, 사랑·미움·노여움·선망의 인간적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등 인간과 같은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는 아크로폴리스라 불리는 언덕에 자신들의 수호신을 모시고 ‘아고라’라고 불리는 광장에서 국사를 의논하는 민주주의적 공동체였다. 이렇게 인간의 도시와 신들의 도시가 공존하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는 생활·정치 공간과 성스러운 공간이 시각적·경험적으로 구분되는 가운데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나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과 같은 언덕 위 신들을 위한 공간에는 성스러운 숲, 즉 성림(聖林)을 조성하여 성역화하였다. 참나무는 제우스, 월계수는 아폴론, 올리브나무는 아테나 여신 등 신전 주변에는 특정 신을 상징하며 숭배의 의미가 있는 나무들이 심어져 숲의 정원을 이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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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가 어린 식물이 심겨 있는 화분(아도니스 정원)을 어머니인 아프로디테에게 전해 주고 있다. 아프로디테는 이를 지붕 위에 올려 놓으려 한다. (기원전 390년경, 카를스루에 바덴주립박물관 소장)

비록 성림이 경건한 장소이긴 하였으나, 그리스 시민들은 지금의 공원처럼 성림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휴식을 취하고 신과 교감하면서 명상을 하기도 했다. 인체나 자연의 비례를 탐구하여 조각이나 파르테논 신전으로 대표되는 건축 등으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것이 곧 신성의 탐구로 여겼던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완벽한 모습의 신체를 가꾸고 체력을 기르는 체육 활동은 또 다른 방식의 경건한 의식이었다. 청년들이 체육훈련을 하던 성림을 ‘짐나지움(Gymnasium)’이라고 불렀으며, 짐나지움을 비롯한 성림 주변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폴리스의 단결을 위한 축제와 연극, 체육경기가 빈번하게 열렸다.

기원전 776년 아크로폴리스가 올려다 보이는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주변의 성림에서는 제우스를 위한 제사와 함께 전 그리스적인 운동경기 축제가 거행되었다. 제사와 운동경기는 4년 간격으로 1천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올림픽 경기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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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니스를 추모하면서 여성들이 시들어 버린 화분을 바다로 던지고 있다. 존 라인하르트 웨글린 1888년. <출처 Wikimedia>

이렇게 짐나지움을 비롯한 성림은 심신을 수련하는데 더없이 좋은 장소로 녹음이 우거진 성림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청년 교육에 열심이었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인근의 짐나지움을 자주 방문하였고,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이곳에 역사상 최초의 대학인 ‘아카데미아’를 세웠는데, 대학교의 초기 형태인 ‘아카데미(Academy)’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아고라(Agora)’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대명사로 쓰이는 상징적 공간이다. 아고라는 고대 그리스 도시의 종교·예술·경제·정치적 삶의 중심지로 시민들에게 개방된 장소였다. 도시가 막 생겨나기 시작하던 때에 아고라는 신들의 도시인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있었다. 도시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규모가 커지면서 아고라는 언덕을 내려와 시민들의 삶 속, 도시 가운데 넓은 공터에 자리 잡게 된다.

지중해성 기후인 그리스는 연중 온화한 편으로, 여름이 덥기는 하지만 건조하여 그늘을 찾아 들어가면 꽤 쾌적한 편이다. 이에 앞선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같은 지역과는 달리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민들이 집 밖을 나와 아고라와 같은 도시의 열린 공간에서 교제하는 일들이 많았다. 기원전 5세기경 아고라에서 야외활동을 즐기는 시민들이 더 늘어나면서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 빛을 가리기 위해 아고라 주변으로 플라타너스를 열을 지어 심었다. 열린 공간에 만들어진 나무 그늘 정원에서 소크라테스와 같은 당대의 학자들이 모여 인간 이성에 대한 철학적 토론과 강의가 이어지면서 현대 서양 사상의 근본이 되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후 도시의 규모가 커지고, 시민들 사이를 조정하는 법원과 관공서 같은 행정기관과 교역을 위한 시장이 생겨나면서, 시민들의 공공공간인 아고라 주변에 도서관·의회·신전·야외 음악당 등 공공건축물이 건설되었다. 건물로 둘러싸이게 된 아고라에서는 시민 생활의 중심이 되는 상업과 사교와 대화의 장이 열리고, 그리스 직접 민주주의에 따라 민회와 시민 재판이 열리는 도시의 핵심 장소로, 이는 현대 도시광장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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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모네. 꽃말은 ‘허무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에는 공공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개인 정원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기원전 8세기경 호메로스가 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에서 당시 정원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는 파에아키아의 왕 알키노오스의 정원과 오디세우스의 아버지 라에르테스의 정원이 등장한다. 신들을 경배하기 위해 정원을 조성하긴 했으나, 늘 기쁨과 행복이 넘치며 풍성한 수확을 자랑하는 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실용적 정원이었다. 또 다른 대표적인 개인 정원으로는 그리스 여성들이 가꾼 ‘아도니스 원(Adonis garden)’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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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그리스의 신들은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적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의 대모였다. 그러나 공사다망했던 아프로디테는 그녀의 양아들 아도니스의 양육을 지하의 여신 페르세포네에게 부탁하게 된다. 잘생긴 젊은 남성으로 자란 아도니스에게 반해버린 페르세포네는 아도니스와 평생 지하세계에서 지내고 싶은 마음에 아들을 찾으러 온 아프로디테에게 돌려보내기를 거부한다. 두 여신은 다투기 시작했고 제우스는 아도니스에게 남은 인생의 3분의 1은 아프로디테, 3분의 1은 페르세포네, 나머지 3분의 1은 그가 원하는 사람과 보내도록 중재한다. 그러나 여지없이 아도니스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선택, 지상에서 삶을 시작한다.

아프로디테와 밀회 관계였던 전쟁의 신 아레스는 아도니스를 질투, 아도니스가 사냥놀이를 할 때 거대한 멧돼지로 변신하여 아도니스를 공격하게 된다. 아도니스는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뒤늦게 도착한 아프로디테는 그의 피에 신의 술 넥타를 붓는데 거기서 피어난 빨간 색 꽃이 꽃말이 ‘허무한 사랑’인 아네모네이다. 아도니스 원은 아도니스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그리스의 부인들이 여름철 하지 무렵 밀·보리와 같이 싹이 쉽게 트는 식물을 깨진 도자기에 발아시킨 뒤 집의 옥상에 올려놓는 풍습에서 유래하는데, 이러한 전통은 이후 지붕이나 창가를 화분으로 가꾸는 포트 가든, 옥상 정원으로 발전하게 된다. 당연히 연약한 새싹은 강렬한 태양에 말라 죽게 되고, 부인들은 다시 화분을 옥상에서 가지고 내려와 근처 해변으로 가서 바닷물에 던져 넣는다. 아도니스는 푸르고 생장하는 세계를 상징한다.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 다시 말해 생명의 활력이 정점을 찍고 성숙의 단계로 넘어가는 그 날을 인간의 공간에 신의 정원으로 기념한 것이다.

계명대 생태조경학과 교수 hj.jung@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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