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寺미학 .25] 안동 봉정사 '영산암 툇마루'...봄바람 드는 툇마루에 앉아 두런두런 마음 나눠도 좋으리

  • 김봉규
  • |
  • 입력 2020-03-05 08:01  |  수정 2021-07-06 10:19  |  발행일 2020-03-05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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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암 누각(우화루) 마루에서 바라본 송암당. 왼쪽의 누각 툇마루는 송암당 툇마루 및 관심당 툇마루와 수평으로 연결돼 있다.
안동 봉정사는 친근하고 편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사찰이다. 갈 때마다 느끼는 점이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엄숙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아늑하고 정감 넘치는 시골 외가나 고향집 느낌이 든다. 봉정사 아래의 마을 곳곳에 있는 고택 분위기가 물씬 난다. 봉정사 초입 길옆 계곡 바위 아래에 있는 정자 명옥대가 가장 먼저 맞아줄 때부터 그렇다. '창암정사(蒼巖精舍)'라는 초서 편액이 걸린 이 명옥대는 퇴계 이황이 즐겨 찾던 장소임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지은 정자다. 이황이 지은 이름인 '명옥대(鳴玉臺)'는 정자 옆 바위에 새겨져 있다. 봉정사는 일주문만 있지, 무서운 사천왕상이 지키고 있는 천왕문이나 금강문도 없다. 만세루에 오르는 계단길도 너무나 소박하고 자연스럽다. 만세루를 지나 마주하는 대웅전에 다가서도 툇마루 덕분에 친근감이 들게 한다. 이 대웅전에는 정면에 나지막한 툇마루가 있다. 사찰 대웅전 앞에 이처럼 툇마루가 있는 경우는 이곳 말고는 본 적이 없다. 1435년에 쓴 중창기가 발견된 이 대웅전은 2009년에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됐다.

◆고택 같은 영산암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면 언덕 위에 한옥이 보인다. 영산암이다. 이 암자는 특히 편안한 분위기다. 사찰 분위기가 전혀 아니다. 조선시대 살림집 한옥 분위기다.

테두리도 없는 소박한 '우화루(雨花樓)' 편액이 달린 누각 아래를 지나 마당에 오르면, 우화루를 포함해 여섯 채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공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을 할 때 꽃비가 내렸다는 이야기에서 가져온 우화루 편액의 유래를 모르면, 의미 그대로 꽃비가 내리는 누각이라고 생각해도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우화루와 그 맞은편의 법당인 응진전, 응진전 앞 좌우에 있는 요사채인 송암당과 관심당, 응진전 왼쪽의 삼성각과 염화실이 있다. 건물들은 3단에 걸쳐 배치돼 있다. 하단에는 우화루가, 중간 마당 좌우에 송암당과 관심당이, 상단에 응진전과 삼성각·염화실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오른쪽 언덕 위 영산암
아늑한 시골 고택 분위기 물씬
마당 아담한 화단 정겨움 더해

마루 통해 요사채 셋 연결사례
다른 사찰서 찾아볼 수 없을듯


마당에 올라서 둘러보아도 사찰 분위기가 전혀 없다. 법당인 응진전의 건물마저 작은 규모인 데다 편액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법당인 줄 알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이 영산암 건물은 모두 툇마루가 있어 더욱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툇마루를 만들 수도 없는 작은 삼성각 말고는 모두 툇마루가 달려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점은 우화루의 이층 대청마루가 마당 좌우에 배치한 두 요사채 마루와 수평을 유지하면서 툇마루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송암당은 우화루 쪽에 한 칸을 큰 마루로 만들어 툇마루와 연결되도록 하고, 마당 반대쪽에도 툇마루가 있다. 봉정사 가까이에 있는 학봉종택이나 서애종택 등 안동의 고택에 들어와 있는 것보다 더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다.

툇마루에 앉아보면 바위 위에 자라는 소나무를 비롯해 배롱나무, 작은 석등, 화단에 자라는 소박한 화초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늑한 마음이 절로 든다. 이런 마음이 들게 하는 데는 마당의 크기가 건물과 잘 어우러지는, 적당한 크기인 점도 중요한 요인인 듯하다.

사찰 건물에 대청마루나 툇마루를 만든 경우도 그렇지만, 마루를 통해 세 건물이 연결되도록 한 사례는 다른 사찰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듯하다. 거기에다 마당의 아담한 화단과 자연석 계단, 바위에 자라는 반송과 배롱나무 등이 어우러져 각별한 정겨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이황이 즐겨 찾던 봉정사

이황은 16세 때(1516년) 봄부터 가을까지 봉정사에 머물며 공부를 했는데, 당시 명옥대를 즐겨 찾아 독서하며 노닐었다. 그리고 50년 후 또 봉정사를 찾아 '명옥대'라는 이름을 짓고 시도 남겼다. '창암정사'의 창암은 '명옥대'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창암정사는 1667년에 처음 건립됐다.

이황이 봉정사에 머물 때나 잠시 들렀을 당시에 영산암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있었다면 툇마루에 앉아 스님들과 주변 풍광의 멋을 누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을 것이다. 유교나 불교 모두 진리를 탐구하며 행복한 인간 삶을 위한 길을 찾아 실천하는 공부가 아니겠는가.

'형이 강화도에 계실 적에는 한 해 두어 차례 서울에 오실 때마다 저의 집에 줄곧 머물면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으니, 인간 세상에서 정말 즐거웠던 일이었다오. 그런데 온 가족을 이끌고 서울에 오신 뒤로는 열흘도 한가롭게 어울린 적이 없어서 강화도에 계시던 때보다도 못하니,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못에는 물결이 출렁이고 버들 빛은 한창 푸르며, 연꽃은 붉은 꽃잎이 반쯤 피었고, 녹음은 푸른 일산에 은은히 비치는구려. 이즈음 마침 동동주를 빚어서 젖빛처럼 하얀 술이 동이에 넘실대니, 즉시 오셔서 맛보시기 바라오. 바람 잘 드는 마루를 벌써 쓸어놓고 기다리오.'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1569~1618)이 마음을 나누던 친구인 권필(1569~1612)에게 보낸 편지다. 광해군 때 필화사건으로 곤장을 맞고 귀양 가다가 동대문 밖 여관에서 죽은 권필의 나이 42세 때 보낸 것이다. 허균이 말끔하게 쓸어놓고 친구를 기다리던 마루도 영산암의 툇마루 같은 마루가 아니었을까 싶다.

한옥 툇마루는 여름과 겨울을 동시에 나야 하는 한옥 환경에서 내외부 공간 사이에서 완충공간 역할을 한다. 이런 툇마루는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동선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면서, 추운 겨울 밖에서 방안으로 들어갈 때 느끼는 갑작스러운 온도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도 한다. 심리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간이다. 툇마루는 쓰임이 별로 없는 공간처럼 보이지만 한옥에서는 매우 중요한 공간인 것이다.

툇마루와 관련, 봉정사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극락전 모습이다. 봉정사를 둘러보다 보면 주변과 뭔가 어울리지 않는, 건축에 대한 일반적 미감을 훼손시키는 느낌을 주는 건물이 바로 극락전이다. 불상을 모시고 있는 법당임에도 무슨 창고 건물과 같다. 앞면 가운데 칸에 작은 문이 있고, 그 좌우 칸에는 작은 나무 살창이 하나씩 있는데 참으로 답답해 보인다.

1972년 해체복원했는데, 복원 전 극락전 사진을 보면 대웅전과 같이 정면 세 칸 모두 사분합 출입문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앞쪽에는 툇마루가 달려 있다. 예전 모습이 훨씬 아름답다. 실패한 복원으로 생각된다. 툇마루가 있고, 벽이 아닌 문으로 된 복원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면 봉정사가 전체적으로 훨씬 더 아름다운 산사가 될 것 같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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