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寺미학 .27] 안동 봉정사 영산암 벽화...탱화·시화·민화 어우러진 암자…'열린 불심'에 친근함 느껴져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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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4-01 08:03  |  수정 2021-07-06 10:18  |  발행일 2020-04-01 제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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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암의 응진전 내부 벽화 중 선학도(仙鶴圖·위쪽)와 송암당 벽화 중 가도의 시 '심은자불우(尋隱者不遇)'를 소재로 한 송하문동자도(부분). 한쪽이 좁아지는 벽면에 그린 것인데, 동자가 가리키는 쪽 끝부분에 시 전문을 한문으로 써놓고 있다.

안동 봉정사 영산암이 종교적 분위기가 아니라 누구나 편안하고 친근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벽화다. 법당인 응진전과 요사채인 송암당에 벽화가 많은데, 이 벽화들의 소재가 불교와는 관계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당대의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지식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좋아했을 소재들이다. 그래서 요즘 일반인들도 흥미로워할 만하다.

◆송암당 벽화

영산암 벽화는 불교적 내용과 함께 민화적 소재, 중국의 유명 한시 등을 소재로 한 그림들로 어우러져 있다.

먼저 송암당 벽화다. 소나무 곁의 송암당(松巖堂)은 건물의 삼면에 마루를 낸 정감 있는 요사채다. 마당쪽으로는 툇마루를 내고, 남쪽 측면에는 대청마루를, 뒷면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마루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정면 문 위에 그려진 벽화의 공간적 배경은 연꽃이 만발한 연지(蓮池)다. 한 장면은 일출 무렵에 물고기가 용으로 극적으로 변하는 '어변성룡(魚變成龍)'을 묘사하고 있다. 어변성룡도는 민화에서 선호되는 소재로, 잉어가 용문의 거친 협곡을 도약해 오른다는 의미에서 '약리도(躍鯉圖)'라고도 부른다. 벽화의 한 쪽에 붉은 글씨로 '어변성룡'이라는 화제를 적어 놓았다.

어변성룡도의 오른쪽에는 달마대사가 갈대 가지를 꺾어 타고 강을 건너는 장면인 '달마도해도'를 그려놓았다. '달마도해(達磨渡海)'라는 화제도 있다.


요사채 송암당의 漢詩 소재 작품들 격 높고 솜씨 뛰어나
법당 응진전 안팎 민화풍 그림은 화려한 색채 운용 눈길
당대 사람들 다양한 생각·가치관 투영돼 각별한 재미도



그 옆에는 같은 연지를 배경으로 사람이 용을 잡아 끌어가는 그림과 함께 '일모귀래도'가 그려져 있다. 일모귀래도는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쓴 사람이 배 위에서 노를 젓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 위에 '일모귀래우만의 (日暮歸來雨滿衣)'라는 화제를 써놓았다. 일모귀래도는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시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불교와는 관계가 없는 소재다. 선비 사회에서 종종 그려지던 그림의 소재다.

이 구절이 나오는 이상은의 '방은자불우(訪隱者不遇: 은자를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고)'라는 시다.

'가을비 주룩주룩 농가 별장 사립문 적시네(秋水悠悠浸墅扉)/ 꿈속에는 여러 번 왔지만 실제 온 것은 드물지(夢中來數覺來稀 )/ 매미 사라지고 나뭇잎은 누렇게 떨어지는데(玄蟬去盡葉黃落)/ 한 그루 사철나무 있고 사람은 돌아오지 않네 (一樹冬靑人未歸)// 성에서 쉬며 보니 아는 사람 없고(城郭休過識者稀 )/ 슬픈 원숭이 울음소리 있는 곳에 사립문 하나(哀猿啼處有柴扉 )/ 강은 파랗고 해는 흰데 나무하며 고기 잡는 길만 있고(滄江白日樵漁路)/ 해 저물어 돌아오는 길에 비가 옷을 다 적시네(日暮歸來雨滿衣)'

송암당의 큰 마루가 있는 쪽의 벽에도 시를 소재로 한 그림이 있다.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유명한 시를 소재로 한 '송하문동자도'다. 한쪽이 좁아지는 가로로 긴 공간에 그렸다. 동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학이 두 마리 있는 그림이다. 학 옆에 시의 전문을 그대로 써놓고 있다. 이곳 분위기가 시가 묘사한 공간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가도의 시 '심은자불우(尋隱者不遇: 은자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는 다음과 같다.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에게 물으니(松下問童子)/ 스승님은 약초를 캐러 가셨는데(言師採藥去)/ 이 산 속에 계시긴 하겠지만(只在此山中)/ 구름이 깊어 어딘지는 모르겠다 하네(雲深不知處)'

이 벽화들은 같은 사람이 그린 것 같은데 솜씨가 뛰어나다. 그림의 격이 매우 높다. 언제 그린 작품인지 모르겠으나 상당히 오래 된 듯하다.

◆응진전 벽화

법당인 응진전에는 안과 밖에 다양한 벽화들이 있다. 여기에도 불교적 소재의 그림과 함께 민화풍의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서쪽 외벽의 벽화로는 호랑이와 까치 그림인 호작도, 불사약을 찧고 있는 토끼 한 쌍의 그림 등이 눈길을 끈다. 호작도는 액막이와 길조의 상징성을 담고 있어 조선후기 민화의 단골소재로 활용했다. 불사약을 빻고 있는 토끼 한 쌍의 민간 설화를 사찰벽화로 만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호작도 옆에는 고목 아래 영지(불로초)가 가득한 곳에 사슴 두 마리가 다정하게 서 있는 그림을 그려놓았다. 뿔이 있는 사슴은 영지를 물고 있다. 그 앞의 뿔이 없는 사슴은 새끼인 듯하다.

반대편 외벽에는 송학도와 함께 두 사람이 용을 밧줄로 낚아 올리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용을 잡는 그림은 성불(成佛)하기 위해 인간으로 태어나려는 용이 인간에게 일부러 잡히는 용의 서원이 담긴 경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인간이 되려는 서원으로 용이 잡혀준 줄도 모르고 의기양양해 하는 두 사람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웃통을 벗어 던진 채 반바지 차림으로 긴 밧줄을 용의 콧수염에 묶어서 당기고 있는 모습이 해학적이다.

송암당 정면 벽화에도 같은 소재의 그림이 있다. 일모귀래도 옆에 있다. 응진전의 벽화와는 다른 분위기다. 갈고리에 코를 꿰인 용이 어부와 한바탕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응진전 내부 벽화에도 민화풍의 그림이 많다. 어변성룡도, 봉황도, 선학도, 파초, 포도, 대나무 등 다양하다. 물론 불교적 소재인 연화화생도(蓮華化生圖), 심우도(尋牛圖), 나한도, 운룡도 등도 있다.

선학도(仙鶴圖)에 등장하는 소재는 쌍학과 함께 고매(古梅), 길상화, 보름달, 불로초 등이다. 고매는 꽃이 만발한 백매다. 검은 매화 등걸은 용틀임하듯 역동적이고, 보름달이 휘영청 매화가지에 걸려 있다. 선학 두 마리가 서 있는 매화나무 아래에는 영지버섯 같은 불로초가 가득 피어 있다.

봉황도는 강렬하고 화려한 보색 대비의 색채 운용이 눈길을 끈다. 바위와 깃털, 오동나무 등이 잘 어우러진 모습이다.

영산암 벽화는 이처럼 보는 사람들의 관심사나 안목에 따라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는 다양한 벽화들이 곳곳에 있어 각별한 재미를 선사한다. 사찰 벽화이지만 당대 사람들의 다양한 민심이 잘 반영된 벽화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생각과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반영할 줄 아는, 열린 사고를 보여주는 암자라는 생각이 든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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