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寺미학 .31] 불영사 대웅보전 기단 거북...대웅보전 짊어진 두 거북 머리…몸체는 어디에 따로 두었을까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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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6-04 07:54  |  수정 2021-07-06 10:16  |  발행일 2020-06-04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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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불영사 대웅보전 전경(맨위쪽)과 대웅보전의 오른쪽 기단 아래에 내밀고 있는 거북 머리(가운데). 불영사 대웅보전 내부 천장 대들보에 목이 없는 거북 두 마리가 붙어 있다.
울진의 대표적 산사인 불영사. 부처 형상의 바위 그림자가 연못에 비친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불영사(佛影寺)는 역사가 깊은 고찰이다. 신라 의상 스님이 651년에 창건한 사찰로 전한다. 비구니 사찰로 정갈하고 차분한 분위기에다 소중한 문화재도 적지 않고, 입구 숲길도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사찰이다. 이 불영사를 찾는 사람이면 누구나 눈길을 보내게 되는 대상이 있다. 대웅보전 기단 아래 양쪽에서 목을 내밀고 있는 돌거북 두 마리다.

◆기단을 짊어지고 있는 두 거북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이다. 대웅전 건물로는 작은 규모다. 기단은 일종의 가구식(架構式) 기단이다. 면석(面石)과 그 위에 덮개로 얹는 갑석(甲石)으로 구성됐다. 2단으로 된 면석은 평평하게 다듬어 허튼층쌓기(크기가 다른 돌은 불규칙하게 쌓기)를 했다. 석재가 서로 물리는 곳은 부분적으로 귀 부분을 짜 맞추어 성곽돌을 쌓듯이 해놓았다.

이 기단의 중앙에 계단을 만들고, 그 양쪽 기단 아래에 돌로 만든 거북 머리가 정면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다. 머리와 앞발 부분만 노출돼 있는데, 마치 대웅보전을 거북 두 마리가 등에 짊어지고 있는 듯하다.

이 거북은 불영사가 있는 자리가 '화산(火山)'이어서 그 불기운을 누르기 위한 비보책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대웅전이 자리한 지형이 바다를 닮아서, 거북을 받쳐주어 물에 가라앉는 것을 막도록 한 비보책이라는 설도 있다.

거북이 법당을 짊어지고 있는 이 파격적 건축장치는 대웅보전이 반야용선(般若龍船)임을 표현하기 위해 거북을 묻은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반야용선은 사바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주는 배를 말한다.

두 마리 돌거북의 몸통은 기단석 아래에 묻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몸체는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몸체를 따로 만들지는 않았을까.

본전 대들보 용그림 발톱 옆에
금색 거북 한마리씩 붙어있어
해학성 드러낸 파격 건축장치

신라 의상 스님이 651년 창건
대웅보전은 1725년 건립 추정
후불탱화, 불화연구 중요자료


◆거북 몸체는 대웅전 대들보에

대웅보전 안에서 그 몸체를 찾을 수 있다. 세 불상이 있는 불단 위의 천장을 가로지른 두 대들보 옆구리에 달라붙어 있다. 작아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양쪽 대들보에는 세 개의 발톱을 가진 용 그림이 있고, 그 발톱 옆에 거북이 한 마리씩 붙어 있다. 금색인데 다리와 꼬리가 달린 몸체만 있다. 머리 부분이 없다. 머리는 밖에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다. 우리 민족의 해학성을 잘 보여주는 조각이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금으로 만든 거북이라 하지만, 오래전에 이를 조사한 문화재 위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동으로 만든 동제(銅製)라고 한다.

기단 아래의 돌거북과 법당 안의 거북을 같은 시기에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보물 제1201호인 불영사 대웅보전의 건립 시기는 대웅보전 내부에 걸린 탱화의 묵서명에 '옹정3년 을사(雍正三年 乙巳)'라고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1725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당의 불상 뒤 벽에는 1725년에 조성된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보물 제1272호)가 걸려 있다. 여섯 명의 스님들이 그렸다고 한다. 비교적 양호한 보존 상태인 이 탱화는 18세기초 조선 불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법당 내부는 이와 함께 기둥과 도리 사이에 조각한 용두 4점, 반야용선, 비천상, 단정학(丹頂鶴), 극락조, 백호 등 수준 높은 그림과 조각, 건축 부재 등으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불단 위에 봉안된 세 불상은 2002년에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높이 1m 정도의 이 불상들은 경내에 있던 6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태풍으로 부러진 것을 활용했다. 그 나무 둥치를 4년간 물에 담그고 말리기를 반복한 후에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불영사 창건 설화

불영사가 위치한 천축산은 산세가 인도의 천축산(天竺山)과 비슷하다하여 천축산이라 불리었다.

651년에 의상 대사(625~702)가 창건했다는 불영사의 창건 설화도 흥미롭다.

의상이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해안을 따라 단하동(丹霞洞) 해운봉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서역의 천축산을 옮겨온 듯한 지세가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맑은 물 위에 부처님 다섯 분의 형상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 부근 폭포에 독룡(毒龍)이 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의상은 독룡에게 설법하고 이 땅을 보시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용이 따르지 않자 법력으로 쫓아냈다. 용은 산을 뚫고 돌을 부수며 떠났다. 의상은 그 못을 메워 사찰을 건립했다. 의상은 이어서 남쪽에 청련전(靑蓮殿)을 짓고 무영탑(無影塔)을 세워 비보(裨補)한 뒤 산 이름을 천축산, 절 이름을 불영사라 했다.

연못에 비친 부처님 모습의 바위는 불영암(佛影巖), 용이 산을 뚫었다는 자리는 용혈(龍穴), 용이 도사리고 있던 곳을 오룡소(五龍沼)라고 했다. 불영사를 휘감아 도는 광천(光川) 계곡은 구룡(九龍) 계곡으로도 불린다.

지금 사찰 경내에 있는 연못이 바로 의상 대사가 부처님 그림자를 보았다는 불영지다.

불영사를 창건한 의상은 그 뒤 오랫동안 천하를 두루 다니다가 오랜만에 다시 불영사로 돌아왔다. 그때 사찰 입구의 마을에 이르러서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몹시 기뻐하며 "우리 부처님이 드디어 돌아오셨군요"라고 말했다. 그 이후로 불영사를 불귀사(佛歸寺)로 부르게 되었다.

의상은 불영사를 창건하고 9년 동안 머물렀고, 원효 스님도 왕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불영사 주변에는 동쪽으로 삼각봉(三角峰), 절 아래로 좌망대(坐忘臺)와 오룡대(五龍臺), 남쪽으로 향로봉(香爐峰)·청라봉(靑螺峰)·종암봉(鍾巖峰), 서쪽으로 부용성(芙蓉城)·학소대(鶴巢臺), 북쪽으로 금탑봉(金塔峰)·의상대(義湘臺)·원효굴(元曉窟)·용혈(龍穴) 등이 있어 모두 절의 승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창건에 대한 이 내용은 1370년 류백유(柳伯儒)가 지은 '천축산불영사기'에 나와 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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