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寺미학 .34] 산사 누각...마루 귀퉁이에 놓인 차와 다구…암자 찾는 이 위한 스님의 배려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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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8-27 08:29  |  수정 2021-07-06 10:15  |  발행일 2020-08-27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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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영천 은해사 운부암의 누각인 보화루에서 등산객들이 차를 우려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전남 강진 백련사는 바닷가에 있는 만덕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백련사에서 보는 강진만 풍광이 각별하다. 백련사 만경루에 오르면 이런 풍광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2019년 초여름에 백련사를 찾았다. 더운 날씨였다. 한참 걸어 만경루 앞마당에 올랐다. 누각 밑을 지나자 대웅보전이 바로 코앞에 나타났다. 명필 이광사가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로 쓴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을 감상한 뒤 바로 뒤돌아 만경루 안으로 들어갔다. '만경루(萬景樓)' 편액도 이광사 글씨다. 멋지고 다양한 경치를 누릴 수 있는 누각이라 '만경'이라는 이름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천 은해사 부속암자 운부암 누각 보화루
방문객 차 우려 마실 수 있도록 개방
스님 마음 씀씀이 고준한 법문보다 깊은 울림
산사 누각, 전통한옥 자연미 가장 잘 드러난 건물로
자연석 주춧돌 사용한 덤벙주초·다듬지 않은 기둥이 특징


◆백련사 만경루, 백흥암 보화루

누각 안으로 들어서자 서늘한 기운이 더위를 가시게 했다. 깨끗하고 넓은 마루에 올라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강진만이 눈에 들어와 가슴을 시원하게 했다. 오른쪽으로는 동백숲이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누각 앞마당에 큰 배롱나무 한 그루가 한창 꽃봉오리를 맺고 있었다. 며칠만 지나면 붉은 꽃을 가득 피운 배롱나무가 선사할 풍광이 그려졌다. 다시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배롱나무는 보기 드물게 수형이 멋진 데다 크기도 크고 생육도 왕성한 상태였다. 수령이 200년 이상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경루는 백련사의 전각 중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정면 3칸 규모의 대웅전보다 훨씬 크다. 측면은 벽체로 되어 있고, 바다 쪽은 모두 문으로 되어 있다. 나무판으로 된 문이어서 닫으면 바깥 풍경이 차단된다. 대웅보전 쪽도 문으로 되어 있다.

영천 은해사 백흥암 누각인 보화루에는 2019년 가을에 올라보았다. 맑은 가을 햇살이 스며든 누각 바닥만 봐도 심신이 깨끗해지며 기분이 좋아졌다. 스님과 차 한 잔을 나누며 누각 밖으로 눈길을 주니 만산홍엽의 만추 풍경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이 보화루 맞은편은 백흥암의 법당인 극락전이다. 보물로 지정된 멋진 건물이다. 극락전 앞 마당과 누각의 마루는 같은 높이로 되어 있다.

누각은 극락전 쪽은 트여 있고, 반대쪽은 여닫는 문으로 되어 있다. 바깥 처마에는 '보화루' 편액, 누각 안에는 '산해숭심(山海崇深)' 편액과 '백흥대난야(百興大蘭若)' 편액이 걸려 있다. 산해숭심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인데, 원본은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백흥대난야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기도 한 박규수(1807~1877)의 글씨라고 한다. 이 보화루(5칸)도 극락전(3칸)보다 규모가 더 크다.

◆차와 다구를 준비해둔 운부암 보화루

은해사 부속 암자인 운부암(雲浮庵)의 누각 보화루에는 각별한 추억이 있다. 11년 전 느꼈던 기분 좋은 감정을 떠올리며 지난 5월 다시 운부암을 홀로 찾았다. 그때처럼 보화루에는 맛있는 차와 차도구, 찻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2009년에는 초겨울에 들렀다. 은해사에서 운부암까지는 3.5㎞ 정도. 며칠 전 내린 비로 산천은 촉촉하고 하늘과 공기는 더없이 맑은 날이었다. 쌀쌀한 기온에다 바람도 약간 불었지만, 친구들과 낙엽이 바닥을 포근히 덮고 있는 산자락 길을 걸었다. 주위의 나목들 풍경이 선사하는 정취가 각별했고, 길 옆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는 음악처럼 들렸다. 운부암 마당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보화루에 올랐다.

보화루에 올라서 바라보니 주변 풍광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마루 한 귀퉁이에 차를 우려먹을 수 있도록 차와 차 도구를 갖춰 놓은 것이 보였다. 법당인 원통전 앞에서 받아온 물을 끓인 뒤 녹차를 우렸다. 운치를 더해주는 맷돌 찻상에 일행 4명이 둘러앉아 따뜻한 녹차를 마시니 기분은 더없이 좋았다. 그리고 열어 놓은 문 앞에는 의자를 2개씩 놓아 두었다. 누구든지 앉아서 풍경을 즐기도록 한 배려였다. 암자를 찾는 이들을 배려하는 스님의 마음이 참으로 고마웠다.

보화루 차 한 잔은 그날 산행의 백미였다. 운부암 스님의 마음 씀씀이는 어느 고승의 고준한 법문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었다.

중국 항주 자사로 있던 백거이(白樂天·772~846)가 도림(道林) 선사를 찾아가 불법을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근본입니까." "어떠한 악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오." "그런 것은 세 살짜리 아이도 다 아는 얘기가 아닙니까." "세 살 먹은 아이도 말할 수 있으나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소."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가르침 하나라도 실천하며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우고 있다.

◆산사 누각의 기능

산사의 누각은 전각 중 가장 크고 잘 지은 건물인 데다 주변의 자연 풍경을 가장 잘 누릴 수 있는 공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산사 누각이 운부암 보화루처럼 차를 우려먹을 수 있도록 해 개방하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산사의 누각은 전통 한옥 미학의 핵심인 자연미가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자연석을 그대로 주춧돌로 사용한 덤벙주초와 다듬지 않은 기둥 등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사찰의 누각은 통일신라 때 선종이 도입된 후 사찰이 도시의 평지에서 벗어나 산속으로 옮겨지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에 누문(樓門) 형식으로 누각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억불정책에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으로 산사는 중심 전각인 주 법당과 누각, 좌우 요사채로 구성되는 ㅁ자 형태의 전형적인 틀이 정착되었다.

이런 유형으로 건립된 산사 누각은 통상 누각의 마루가 법당 앞마당과 같은 높이로 맞추어지고, 누각 아래가 법당으로 가는 통로가 된다. 그리고 누각이 예불의 공간을 겸하기 때문에 법당 쪽은 트여 있고, 반대쪽은 문을 다는 구조가 된다. 선암사 강선루, 고운사 가운루 등 다른 성격의 누각도 있기는 하다.

이런 누각은 출입구 기능과 함께 강당, 예불, 법회, 전망, 사찰 사무, 좌선 등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범종이나 법고 등을 설치하는 종루·고루 등으로도 활용되었다.

누각은 사면이 벽이나 창호로 폐쇄된 경우(해인사 구광루, 화엄사 보제루, 천은사 보제루 등), 법당 방향만 벽이 없는 경우(선운사 만세루, 화암사 우화루, 내소사 봉래루 등), 사방이 트인 경우(봉정사 덕휘루, 표충사 우화루, 부석사 안양루 등) 등이 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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