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1] 역사와 가치....자연친화·소통화합·나눔배려 실천 조선시대 사립 고등교육기관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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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9-17 07:55  |  수정 2021-07-05 13:40  |  발행일 2020-09-17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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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액서원 편액들. 위로부터 '소수서원' '도산서원' '옥산서원'. 나라에서 공인하면서 내려주는 사액 편액의 글씨는 당대 명필이 주로 썼는데, '소수서원' 글씨는 유일하게 당시 임금인 명종이 직접 썼다. '도산서원'은 석봉 한호가, '옥산서원'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

지난해 7월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세계유산총회에서 한국의 서원 9개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소수서원(영주), 도산서원(안동), 병산서원(안동), 옥산서원(경주), 도동서원(대구), 남계서원(함양), 필암서원(장성), 무성서원(정읍), 돈암서원(논산)이다.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으로서 조선의 핵심 이념인 성리학을 보급하고 구현하는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대표 서원들이다. 이 9개 서원에 대해 국경을 초월할 만큼 독보적이고, 현재와 미래 세대의 전 인류에게 공통으로 중요한 가치를 의미하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세계 인류가 공유하며 보존해 가야 할 문화유산이 된 이 서원들을 답사하며 각 서원에 담긴 이야기와 유무형의 가치를 알아본다.

중국 서원 모델로 탄생했지만
과거급제보다 학문·수양 중심
1543년 건립 백운동서원 '최초'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에 자리
지역 독서·출판문화 이끌기도

우선 한국의 서원 일반에 대해 살펴본다. 서원의 원조인 중국의 서원을 제치고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이 되었다. 한국의 서원은 중국의 서원을 모델로 삼아 탄생했지만, 중국과는 크게 다른 차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에 사립학교였던 중국 서원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관이 주도하는 관학(官學)이 됐던 것과 달리, 한국 서원은 민간 차원에서 건립된 사설 학교라는 점이다. 그리고 중국 서원이 관료를 양성하는 준비 기구의 성격이 강했다면, 한국 서원은 학문을 통한 인격 수양이 중심이 되는 가운데 향촌 사회에 깊숙이 스며들어 교육과 교화를 모두 추구했다. 공립 교육기관인 성균관이나 향교는 과거시험 합격이 주목적이던 것과는 달리, 서원은 그곳에 모시는 선현의 정신과 뜻을 기리며 학문을 닦고 인격을 도야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이 "오늘날까지 교육적·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하고 있는 한국의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고 평가했다.

이와 관련해 중국 대표도 "중국은 이코모스(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의 권고와 한국의 서원 세계유산 등재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우리는 세계유산 목록에 새로운 유산을 등재시킨 한국 대표단에 축하를 보낸다. 중국어로는 '슈우위안'이라 불리는 성리학 교육기관이 중국에서 시작되기는 했지만, 한국의 서원 역시 16~17세기에 동아시아 유교 문화의 보급과 현지화에 기여한 중요 장소다. 이러한 서원은 자연환경과 잘 조화되어 독자적인 건축설계를 발전시킴으로써 한국에 성리학적 이상이 꽃피도록 도왔다"며 지지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남계서원도
경남 함양에 있는 남계서원을 그린 남계서원도(1875년). 사당이 뒤쪽에 있고 공부하는 강당이 앞쪽에 있는(前學後廟) 한국 서원 건축양식의 원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 서원의 역사

서원은 조선시대 지역 지식인들이 세운 사립학교다. 조선이 치국 이념으로 채택한 성리학을 사대부 계층이 자신들의 학문으로 정착시키면서 만들어낸 사립 고등교육기관으로,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영주)에 세운 백운동서원이 처음이다. 백운동서원은 이황의 노력으로 1550년 조정으로부터 '소수서원'으로 사액 받으면서 최초의 사액서원, 즉 나라가 공인한 사립학교가 되었다. 사액서원에는 서적과 토지, 노비 등이 지원되었다. 이후 서원은 전국적으로 확산하면서 조선 사회를 이끌어가는 한 축이 된다.

서원은 선조 연간(1567~1608)에만 60군데 이상이 생겨나고, 그중 22개가 사액되었다. 숙종(1674~1720) 때는 130개가 넘는 사액서원이 등장했다. 서원철폐론이 등장한 1741년(영조 17) 당시에는 서원과 서원의 역할까지 한 사우(祠宇) 등을 합해 900여 곳에 이르게 됐다. 남설된 서원은 학문과 인격 도야의 전당이 아니라 당쟁논의의 소굴이 되었고, 향촌의 교화를 담당하는 곳이 아니라 민폐의 본산이 되었다.

이처럼 서원 본래의 취지에 벗어나면서 비난과 원성의 대상이 되고, 서원무용론을 넘어 서원철폐론이 대두되었다. 1741년 4월8일 '갑오년(1714년) 이후에 건립된 서원과 사우·영당 등 모든 제향 사원을 철폐하는 조치'를 내린 데 이어 급기야 1871년 3월20일 '영원히 받들어야 할 충절 대의 제현을 기리는 47개 사액서원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들의 현판을 떼라'(고종실록)는 명을 하달한다. 이것이 유명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중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9개다. 모두 사액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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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표지석(무성서원).

◆서원의 역할과 구성

유교 선현을 기리는 제향(祭享), 학문(성리학)을 갈고닦으며 성리학적 인재를 양성하는 강학(講學)이 서원의 기본적 기능이다. 따라서 서원 건축의 중심은 제향 기능을 담당하는 사당과 강학의 공간인 강당이다. 서원은 일반적으로 선현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뒤쪽 높은 곳에 있고, 그 앞에 학업을 위한 강당이 위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다.

관학인 향교나 성균관의 사당에는 공자와 맹자 등을 비롯한 중국과 한국의 성현(聖賢)을 모시는 데 반해, 서원은 그 지역 출신이거나 지역과 연고가 있는 선현(先賢)을 모신다. 선현 제사에는 일반 가문의 제사와는 달리 친인척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선비들이 참여하는 제사로 진행됐다.

서원 교육은 과거시험을 벗어나 참다운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타고난 본성을 밝히는 인격 도야가 핵심이었다. 서원 교육은 개별학습인 독서(讀書)와 공동학습인 강회(講會)를 병행했다. 독서는 '소학'부터 시작해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공부했다.

서원은 또한 많은 서책과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는 지역의 지식 중심이기도 했다. 서원의 장서 및 출판 문화는 지식 확산과 문화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서원은 장서목록을 작성하고 서책을 서원 밖으로 유출하지 못하게 하는 규정을 정하는 등 엄격하게 관리했다. 초기에는 기증이나 구매로 서적을 마련하다가 후기에는 서원이 직접 서책을 간행했다.

이런 한국의 서원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 '소통과 화합' '나눔과 배려'의 정신과 가치가 담겨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대부분 주변의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에 자리하고 있는 한국의 서원은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기 위한 제향공간, 학생들의 공부를 위한 강학공간, 휴식과 교류를 위한 유식(遊息)공간, 제향과 강학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지원공간으로 구분된다. 이런 공간들은 주변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지는 건물배치와 건축공간을 형성하면서 성리학적 가치관과 자연관을 응축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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