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수상작 - 신영배 시집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 노진실
  • |
  • 입력 2021-01-01 08:20  |  수정 2021-01-01 08:35  |  발행일 2021-01-01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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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호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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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그 끝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혼자

그 옆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밟힌,

여린 껍질을 가지고 있던 것

그 위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수풀 속에 숨은 소녀

소녀의 눈동자 앞에

끌려가다 벗겨진 신발이

다른 세상에 놓이고

한쪽은 신발을 찾을 수 없는 꿈속

그 속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슬픈 맨발 위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그녀들은 달려와 나의 시들을 헤치죠

가져갈 것 하나 없다고 투덜거리죠

나는 시-옷을 입고 있어요

걸칠 것, 그거라도 가져가야겠다고

그녀들은 내 옷을 다 벗겨 가죠

물모자

그 옷에 딱 어울리는

이 물모자요

나는 그녀들에게 달려가요



시-옷은 걸쳐도 알몸이에요

그녀들은 울어요

우는 알몸 위에 물모자

선물할게요

나도 울어요

수로에 알몸으로 처박혔던 그녀와

폭우 야산에서 알몸으로 흘러내렸던 그녀와

화면에 뜨고 돌아다니는 알몸과

버려지고 어두워지는 알몸과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당신이 도는 길목에서

파도가 칠 거예요

노래처럼요

문 뒤엔 꽃과 바다를 놓을게요

물모자를 쓰고 문을 여세요

바람은 물모자 속에서 잠잠 해요

뒤집히지 않는 단어를 하나 가지세요

연주를 해야 하는데 손가락들이 사라진 밤이 있어요

달빛 위에 살짝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건반 위에서 흰 달을 쳐요



시-옷을 입은 내가

시-옷에게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혼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암이 재발할지 몰라요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달밤엔 달을 따라 움직여요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당신은 한창 시도 씹어 먹을 나이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나를 따라온 길고양이 내가 따라간 길고양이

길을 물로 바꾸고 나는 물고양이

강가에서 탁 꼬리를 세워요



예쁘장한 단어도 하나 가져요

지금은 물모자를 쓰는 계절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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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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