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심사평

  • 노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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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1-01 08:20  |  수정 2021-01-01 08:34  |  발행일 2021-01-01 제9면
"견고한 현실 탐색 풍부한 암시와 의미 몽환적 은유로 빛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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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열 분의 시집 중 김현의 '호시절'(창비, 2020), 신영배의 '물모자를 선물할게요'(현대문학, 2020), 유병록의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창비, 2020), 유계영의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문학동네, 2019) 등을 최종 후보작으로 지명했다. 이 시집들이 높은 시적 성취와 더불어 저마다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긴 논의 끝에 신영배 시인의 '물모자를 선물할게요'를 제4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다만 유병록 시인이 보여준 고통의 핍진성이나 김현 시인의 거침없고 발랄한 상상력도 문학상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져 아쉬움을 남겼다. 두 시인의 수상을 다음으로 미룬 것은 수상자와 견줘서 상대적으로 젊고 미래에 더 큰 상을 받을 기회가 있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신영배 시인의 시는 고립과 고독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독자적인 계보를 빚는데,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높고 깊은 상상력이 빚어낸 몽환적인 은유로 빛난다. 시의 화자(話者)는 물모자를 쓰고 거울을 보고, 커피를 내리고, 물구나무를 선다. 누군가 달빛으로 의자를 만들면 강물이 의자 속으로 들어간다. 원피스를 입고 왈츠를 추던 소녀들은 나무속으로 들어가거나 장미에 빠진다. 그 마술적 리얼리즘의 원천은 멀고 아득해서 짐작조차 어렵다. 시인이 펼치는 '물모자의 세계'는 물모자를 쓰고(혹은 썼다고) 상상하는 세계일 뿐만 아니라 결국 '찾을 수 없는 시집' '빗물과 흐르는 시집' '노을보다 멀리 가는 시집'을 찾아가는 고독한 여로에 귀속되는 것이다. 물모자의 세계는 현상 세계의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는 문턱에 걸쳐져 있다.

'사이'의 공간은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 심판과 결정이 유예되는 곳, 내일도 아니고 어제도 아닌 곳이다. 시인은 그 '사이'에서 물모자를 쓰고 물구두를 신고 이동하는 뮤즈들을 관찰한다. 세계의 바깥 그 어딘가 있는 세계 혹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세계. 그곳에선 부재하는 현실에 한 줌의 환상을 뒤섞어 빚는 몽상과 은유가 부풀고, 천진하고 사악한 동화가 펼쳐진다. 그곳도 암이 재발하고 약한 자가 짓밟힌다는 점에서 현실의 고통과 그늘을 반영하는 듯하다. 신영배 시인의 수수께끼 같은 상상력이 빚는 물모자를 쓰고 움직이는 뮤즈들에 탐색과 관찰이 현실에 대한 풍부한 암시와 의미를 머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의 무게를 견딜 만큼 충분히 깊고 견고하다고 판단해 제4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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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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