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신영배 시인 수상소감

  • 노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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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1-01 08:20  |  수정 2021-01-01 08:36  |  발행일 2021-01-01 제9면
"焦土 위에서 쓰는 시를 생각하겠습니다"

사진17
▶신영배 시인은1972년생. 2001년 '포에지'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기억이동장치'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물안경 달밤' 등이 있다.

수상 소식을 듣고 작은 시집을 안아주었습니다. '물모자를 선물할게요'는 소시집으로 기획된 정말 작은 시집입니다. 그 작은 시집에 큰 상이 주어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시집을 어디에 놓아두었는지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찾았고 안아주었습니다.

작은 시집을 쓰며 작은 발을 생각했습니다. 시집에 작은 발이 달려서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어딘가에 닿을 수 있다면, 아마도 아픈 누군가일 것이며 따듯함이 필요한 어디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발은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시집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시집을 쓸쓸한 곳에 놓아두었습니다. 누군가 나앉은 길가나 부서진 계단 위, 누군가 실종된 지하도나 야산, 혼자 쓰러진 바닷가나 그 의자 위…… 시를 쓰는 제 방의 지도였습니다. 그 지도를 펼치고 시집을 옮겨달라고 주문을 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 시들이 몇 개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시집을 어디에 놓아두었는지 잊고 있었습니다. 시집을 옮겨야 하는데, 시를 써야만 할 수 있는 그 일인데, 저는 어둠 속에 막막하게 서 있었습니다. 이 상의 소식은 누군가 그 작은 시집을 살짝 옮겨주었다는 소식 같았습니다. 시를 향한 마음들이 모아준 격려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 상을 받고 제 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구상 시인은 표현 기교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기어(綺語)라고 하여 경계하였습니다. 이 상이 저에게 짚어주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물을 들여다보듯 그 지점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막막한 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초토,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땅입니다. 구상 시인의 '초토(焦土)의 시'는 1950년대 전쟁으로 인한 암울한 세상을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마주한 세상도 그 초토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상의 무게와 함께 이 초토 위에서 쓰는 시를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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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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