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하강곡선 그리던 대구 제빵계서 케이크로 새로운 시대 열었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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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1-15   |  발행일 2021-01-15 제35면   |  수정 2021-01-15

'빵 권하던 시절'이 있었다. 빵집은 문만 열면 돈을 벌었다. 한동안 빵집의 생존을 위협하는 경쟁자는 거의 없었다. 그 때문에 제빵인도 점점 구태의연해진다. 새로운 기술 개발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매너리즘에 빠져 미래의 빵에 대해서 고민할 열정을 뺏긴 것이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들면서 대한민국 제과업계의 지형도는 이전과 판이하게 돌아갔다. 다국적 패스트푸드 브랜드의 습격이 시작됐다. 빵 말고도 다양한 간식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온갖 스타일의 다방과 레스토랑으로 인해 다과점 구실을 한 지역 제과점의 매력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래도 대다수 제과점은 '설마 제과점이 어떻게 될까'라며 안이하게 대처했다. 80년초 밀탑제과, 89년 파리바게뜨의 새로운 버전의 공세를 뉴욕, 뉴델, 런던제과 등 지역 최고의 빵장수들은 현실을 제대로 분석해내지 못한다. 세상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건너가듯 빵 시장도 많이 달라졌다. 케이크만 해도 이전의 딱딱한 버터케이크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다. 솜사탕 같은 '생크림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판이 달라지면 주인의 마인드도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대구는 우물안 개구리 유전자가 다분했다. 돈을 좀 벌면 재투자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90년대말 1천여 개에 육박하던 1급 빵집은 2000년대로 건너오면서 풍차베이커리, 공주당, 밀밭베이커리, 삼송베이커리 등 몇 개만 제외하곤 나머지는 프렌차이즈빵한테 밀려나버린다. 그런 틈새에서 발상의 전환을 한 빵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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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가네케익의 다양한 케이크.

◆ 케이크 특화브랜드…최가네케익

동성로 최가네 케익
경주 출신 최무갑 사장 창업
한강 이남 첫 케이크 전문점
10년 전쯤 가족에 가업 넘겨
서울·일본서 일 배워 대구로
미니케이크 좋은 반응 얻자
신개념 무스케이크 '나폴레옹'
각종 신제품으로 돌풍일으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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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제과사를 운영한 아버지로부터 기술을 배운 최무갑, 그는 동성로 뉴델에서 시작해 훗날 킹뉴델, 로마제과, 연이어 경주도쿄호텔 제과부 기술자로 일을 하다가 1999년 전국에서는 처음으로 케이크 하나만 특화한 케이크전문점 시대를 연다.

경주 출생인 최무갑(81) 최가네케익 1대 사장인 그가 10년전쯤 반세기 이상 이어오던 가업을 가족한테 넘겨주었다. 두 아들(재호·재익)을 축으로 딸(수연)은 매니저, 그리고 아내(김미연)는 케이크디자이너로 일사불란한 팀워크를 보여준다.

이 집은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케이크 하나에만 집중한다. '케이크 특화 시대'를 개척한 것. 처음에는 보수적인 입맛의 대구에서 이렇게까지 케이크가 불티나게 팔려나갈지 그도 전혀 예상치 못한다.

최무갑의 가계는 빵 하나로 뭉쳐졌다. 아버지(최팔룡)도 '빵인생'이었다. 삼미제과사, 삼송빵집, 송영사, 고려당, 수형당 등 일제강점기 북성로 일본 빵집 이마사카 출신 제빵인 7명이 모여 7인회를 만들때 일원이 된다. 7인회는 나중에 뉴델제과 최종수 사장 축으로 '과우회(菓友會)'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은 일본 연수를 통해 선진 제빵 기술을 가져온다.

아버지가 창업한 삼미제과사는 삼덕동 대구형무소(1910년 대구감옥으로 출발해 23년 대구형무소, 61년 대구교도소로 개칭한 뒤 71년 6월1일 화원으로 이전) 정문 바로 근처에 있어 수형자들에겐 잊지 못할 추억의 빵집이 된다. 바람 잦은 날엔 빵 굽는 냄새가 형무소 담 안으로 들어간다. 재소자들의 침샘을 마구 자극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고문'이었다. 면회인들은 삼미의 빵을 사들고 갔다. 출소자들도 복수(?)하듯 삼미 빵 등을 배터지게 먹고 집으로 갔다. 아버지는 50년대초 수형당보다 앞서 군에 빵을 납품하기도 했지만 친구인 수형당 진병수 사장의 사업 수완을 이겨내지 못하고 1960년대로 건너오면서 좌초하고 만다.

최무갑은 '바람잦은 삶'이었다. 빵에 집중하려 하면 꼭 '마(魔)'가 들어 일을 망치게 했다. 그래도 빵 하나만은 버리지 않아 오늘의 영화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젊은날 수형당에서 일을 배우다가 서울로 올라가 고려당 등 중심가 여러 빵집에서 일을 배운다. 그러다가 대구로 내려와 뉴델제과 공장장을 하면서 동분서주의 나날을 보낸다. 이후 독립해 동성로에서 '킹뉴델제과점'을 오픈했지만 롱런하지 못한다. 재차 대구백화점 옆에서 '로마제과'를 오픈했는데 그 무렵 12·12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후 툭하면 데모대가 거리를 점령하는 바람에 영업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부도가 난다.

그 어름 서울 도쿄호텔 제과부에 취업했고, 이후 경주도쿄호텔 기술자로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 시절 경주 대표빵이랄 수 있는 황남빵의 인기를 실감하곤 그걸 벤치마킹해 '경주최가네빵'을 개발해 호텔은 물론 나중엔 별도 가게를 내 경주에서 팔기 시작한다.

대구로 온 그는 1997년 아카데미극장 옆 골목에서 '최가네빵'을 오픈한다. 참으로 많은 빵집을 전전한 끝이었다. 1년쯤 지났다. 영업이 나아지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봤다. 파리바게뜨, 신라명과, 크라운베이커리, 뚜레쥬르, 스텔라베이커리 등 쟁쟁한 브랜드가 자신을 고사시키고 있었다. 깊은 밤 곰곰이 생각해 본다. 고만고만한 빵, 이것으로는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본 노포처럼 자기만의 빵을 내밀지 못하면 망하고 말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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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가네케익을 안정궤도에오르게 한효자 품목인 나폴레옹

여러종류의 빵을 다 포기하자. 대신, '케이크 하나에만 집중하자'고 다짐한다. 처음에는 뷔페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쿠키만한 3개 1천원짜리 미니케이크부터 판다.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조금 변형시켜 1개 3천500원짜리 둥근 미니케이크로 넘어갔다. 쾌속항진이었다. 케이크 하나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99년 간판부터 갈았다. '최가네케익'이었다. 통케이크, 조각케이크부터 대박을 친 신개념 무스케이크인 나폴레옹, 그리고 2004~5년 대구에 신드롬을 일으켰던 조각 딸기케이크, 최근에는 각종 초콜릿 등을 연이어 연착륙시킬 수 있었다.

초창기 무스케이크를 만들려면 괜찮은 젤라틴을 확보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재료를 확보하기 힘들었다. 인맥을 동원해 호텔 관계자들이 조합형태로 만든 동구 동촌에 있는 호텔용품센터에서 외국으로부터 수입된 생크림과 젤라틴을 구해온다. 특히 딸기케이크는 1980년대 후반 일본 음식 투어를 하던 중 신선한 아이디어다 싶어 벤치마킹한 것이다. 처음에는 경주도쿄호텔에서 먼저 선보여 히트쳤고 2001년쯤 최가네 최대 효자품목으로 자리잡게 된다. 반달모양의 반들거리는 빨강 무스케이크인 '나폴레옹'은 한 파워푸드블로거가 잘 홍보해주는 바람에 대박이 난다. 3년쯤 현재 자리로 이전한다.

◆마들렌 베이커리

수성교 마들렌 베이커리
에띠앙 인수로 시작된 마들렌
형은 경영·동생은 빵기술자
모두가 재고관리 힘들던 시절
당일생산 당일판매 원칙 다짐
고가재료로 건강빵 선도 신념
생크림 케이크 유행시키면서
조각케이크 새로 편집해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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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들렌은 여러 물성의 조각 케이크를 통케이크처럼 세팅한 모둠 케이크시대를 열기도 했다.

2001년 수성교 동쪽끝 근처 삼우아파트 골목 안에서 '에띠앙'이란 빵집이 문을 연다. 그게 훗날 직영점 15개란 만만찮은 신장세를 보이게 되는, 모듬 조각케이크와 무스케이크의 신지평을 열어간 '마들렌베이커리'의 뿌리가 된다. 후에 윈도우 베이커리에서 양산베이커리 브랜드로 변신한다. 에띠앙의 여주인은 마들렌 형제에게 자기 가게를 인수하라고 권유했다. 형 최병진은 경영에 일가견이 있었고 동생 최병표는 빵 기술자였다. 2002년 에띠앙은 '마들렌'으로 이름이 바뀐다. 최가네케익과 함께 신개념 케이크 시대를 리더한다.

형제는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삼촌의 섬유공장에서 일하는 바람에 대구에서 성장한다. 동생은 공고를 나와 전자회사에 다니다가 자기 길이 아니다 싶어 사직서를 던진다. 그리고 21세 때 시내 동양제과제빵학원에 들어가서 기술을 배운다. 남구 봉덕동 미리네아파트 근처 셰프블랑제 만평점에서 생애 첫 빵집 직원이 된다. 한달간은 살인적 업무에 혹사당한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던 시절이었다. 오전 6시에 일을 시작, 다음날 오전 4시에 일이 끝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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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무스케이크의 신지평을 연 마들렌 기술자 최병표. 그는 당일 생산한 건 오직 당일에만 판매한다는 당생당판의 제조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어 서울로 상경해 시내 '목마베이커리'에서 3년 정도 일을 하다가 다시 대구로 내려왔다. 명덕네거리 근처 한 빵집 책임자로 발탁된다. 직원인 상황과 책임자인 상황이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기술과 경영의 상관관계에 대해 심도있는 경험을 갖게 된다. 그러던 차에 수성교 근처 빵집 에띠앙과 인연을 맺는다. 1년쯤 있다가 그 가게 사장으로부터 인수제안을 받는다. 그 소식을 접한 아버지가 서울 SK본사 전략기획팀에서 일을 하던 장남에게 지원요청을 구한다. 형도 미련없이 짐을 쌌다. 그렇게 형제는 6천여만원을 갖고 마들렌베이커리시대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당시만 해도 스텔라, 풍차, 삼송, 풍미당, 공주당 등이 있었지만 1980년대 절정을 맞던 대구베이커리는 하강커브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들의 미래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마들렌은 '당생당판' 원칙을 세운다. '당일 생산한 건 오직 당일에만 판매한다'는 다짐이다. 당시 여느 빵장사들은 '그건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너나없이 재고관리에 골머리를 앓던 시절이었다. 방부제 등을 넣어 하루라도 더 연장해 빵을 팔려고 했다. 물성이 좋은 빵이 나오기 힘든 시절이었다. 형제는 빵문화가 달라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람들도 폭증하는 국면이라 보기만 좋은 빵이 아니라 프리미엄급 식재료를 사용한 건강빵시대를 선도하고 싶었다. 그게 그들의 신념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생크림'이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만한 생크림이 없었다. 다들 카스텔라 시트 위에 아크릴 코팅을 해놓은 듯한 뻐덩뻐덩한 버터케이크에 기댔다. 그런 와중에 동서 골드라벨이라는 식물성생크림이 시판되고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 소비자의 입맛은 버터케이크에 길들여져 있었다. 업자들이 식물성생크림을 권유해도 좋아는 보여도 정작 그것으로 갈아타는 업주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형제는 그렇게 생크림케이크시대를 어렵게 열어젖혔다. 기존 통케이크, 그리고 갖은 과일류를 얹은 모듬케이크, 낱게로 팔리는 조각케이크를 새롭게 편집해 팔았다.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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