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6] 이규환…대구출신 한국대표감독 리얼리즘 영화의 대가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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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3-15   |  발행일 2021-03-15 제20면   |  수정 2021-06-27 18:12
3·1운동 뛰어든 소년, 영화감독으로 성장…日 강점기 국민의 비애 작품통해 대변
6·25전쟁 후엔 '춘향전' 등 히트작 터트리며 국내 영화역사 전환기마다 '큰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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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사문진 주막촌 입구에 세워진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 촬영지 표지석. 〈영남일보DB〉

대구출신 영화감독 성파(星波) 이규환(李圭煥. 1904~1982)은 국내 영화 초창기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손꼽힌다.

1930~70년대를 무대로 활동한 이규환은 향토색 짙은 리얼리즘(사실주의) 영화의 대가로 총 23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계의 '귀재'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 1902~1937)와 더불어 우리나라 영화계를 이끌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옛 영화 평론가들 사이에서 "북한에 회령 출신의 나운규가 있다면, 남한에는 대구 출신의 이규환 감독이 있다"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이 감독이 한국 영화사에 남긴 족적은 크다.


◆영화를 동경했던 소년

이규환은 190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이후 서울보정학교와 휘문의숙을 다니다 대구로 내려와 계성중에 편입했다. 학창시절부터 극장가 주변에 머물며 무성영화의 변사(辯士) 흉내를 내는 등 영화에 관심이 컸다. 계성중 재학 당시 3·1운동에 가담했던 이규환은 경남 밀양으로 잠시 몸을 숨겼다가 대구로 돌아온 후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품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구에서 3·1운동이 벌어졌을 당시의 옛 기사를 살펴보면 '이규환'이라는 이름이 최연소(15세)로 이름이 올라 있다. 체포된 인물이 영화감독 이규환과 같은 인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이가 같고 행적도 일치한다는 점에서 눈길이 간다. 어쨌든 이규환의 3·1운동 참여는 훗날 자신의 영화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상상력의 모티브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영화에 대한 열정은 이규환을 조선 밖으로 이끌었다. 1923년 영화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향한 이규환은 도쿄의 일본영화예술연구소에서 기초 수련을 받았으며, 1927년에는 미국 할리우드행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1928년 일본 교토 신흥키네마촬영소에 들어가 3년 가까이 연출수업을 받은 후 영화인으로서 역량을 다졌다.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대가

이규환의 감독 데뷔작이자 대표작인 '임자 없는 나룻배'의 배경은 고향 대구다. 1932년 단성사가 개봉한 '임자 없는 나룻배'는 대구 달성 사문진나루터에서 촬영됐다. 이는 탄탄했던 대구의 영화 제작 기반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당시 대구에는 1922년 조선 자본으로 지어진 만경관 극장이 자리해 있었으며, 이 극장을 중심으로 영화계의 인적·물적 자원이 집중됐기 때문이다.

'임자 없는 나룻배'는 일제강점기 하에서 표현할 수 없던 민족의 아픔을 우회적인 상징 기법을 통해 보여주었다. 현대 문명의 상징인 철도와 뱃사공을 통해 나라를 잃은 국민의 비애를 보여주는 등 당시 시대상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국내 1세대 영화평론가 김종원은 "'임자 없는 나룻배'는 일제강점기 한국 영화 중 춘사 나운규의 '아리랑'과 더불어 대표적인 사실주의 영화다. 뱃사공 부녀를 통해 일제의 식민지 침탈을 상징적으로 묘사했다. 열차는 '문명의 이기', 나룻배를 통해 어려운 삶을 이어가는 뱃사공은 '조선 사람의 어려운 형편'을 대변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족의 비애를 담은 리얼리즘의 출발점이 '아리랑'이었다면 '임자 없는 나룻배'는 '아리랑'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이규환 역시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임자 없는 나룻배'에 대해 "항일정신과 문명비판을 다뤄본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영화 개봉 당시 변사들이 일본 경찰을 '검둥이'로 표현하다 고초를 겪었다는 일화는 감독이 영화 속에서 의도했던 바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임자 없는 나룻배'의 캐스팅도 화려하다. 당대 최고 배우 나운규가 출연했으며, 당시 16세로 훗날 무성영화계 스타로 떠오른 문예봉의 데뷔작이다. 특히 나운규는 '아리랑' 이후 조선 최고의 스타 반열에 올랐지만 후속 작품의 흥행 부진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각종 스캔들에 휘말리며 어려움을 겪던 나운규는 이규환이 메가폰을 잡은 '임자 없는 나룻배'를 통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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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사문진 주막촌 입구에 세워진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 스틸컷. 〈영남일보DB〉

◆역사의 변곡점마다 영화 발전 기폭제를 터트리다

특히 이규환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6·25전쟁 등 역사의 변곡점마다 국내 영화 발전의 기폭제를 터트린 대표적 영화인으로 거론된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 개봉한 '나그네' 또한 '임자 없는 나룻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리얼리즘 영화로 평가받고 있으며, 후대의 영화인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규환은 광복 후에도 한국영화의 부활을 이끈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이규환의 1946년 작품인 어린이 영화 '똘똘이의 모험'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피폐했던 국내 영화계 재건의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규환은 1955년 사극 영화 '춘향전'을 통해 전후 한국 영화 중흥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춘향전'은 서울에서만 12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당시 기준으로 대단한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김종원 평론가는 "이규환은 국내 영화 역사의 전환기마다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춘향전'은 한국 영화도 외국 영화와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 작품이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춘향전 이후 한국 영화계에서는 한동안 사극 열풍이 불었고, 예술성에 중점을 둔 문예영화의 부흥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규환의 리얼리즘 영화는 후대의 감독들에게도 계승됐다. 한국 고전 영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오발탄'(1961)의 유현목 감독이 '춘향전'의 조감독으로 이규환 감독과 인연을 맺은 바 있다.

◆역사의 굴곡을 넘어

최근에는 이규환이 일제강점기 친일활동에 가담했다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당시 시대 상황으로 미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란 의견이 평단의 대체적 평가로 보인다. 이규환은 서광제 감독의 1938년 친일영화 '군용열차'의 시나리오 집필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김종원 평론가는 "이규환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큰어른이다. 당시를 살아간 누구에게나 굴절된 모습이 있을 것이다. 종합예술로 분업이 필수적인 영화의 특성 때문에 이규환도 어쩔 수 없이 (친일영화 촬영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지 (친일영화) 시나리오 집필에 나섰다는 이유만으로 이규환 감독의 역사적 평가를 절하시킬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규환 감독 등 문화계에 족적을 남긴 지역 인물들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계명대 언론광고학부 서정남 교수는 "대구는 영화에 대한 뿌리가 깊은 도시다. 앞으로 '성파 영화제'를 만드는 등 지역문화의 원형을 보존하고 기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공동기획  대구광역시
▨사진 출처=대구문화재단·영남일보DB
▨도움말 =김종원 영화평론가·서성희 대구영상미디어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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