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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출지와 조선 현종 5년인 1664년에 임적이 지은 이요당. 사적 제1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위가 낮은 서출지 가장자리에 진흙 뻘이 드러나 있고, 못 가운데에는 비쩍 마른 연 줄기들이 빼곡히 모여 있다. 서출지의 봄은 더디고 연들은 동안거를 끝낼 기색이 없다. |
◆남산동 가는 길
남산 아래 통일전 방향으로 꺾어 들면 길은 더욱 한적해진다. 게으르게 다리를 끌 듯 남천을 건넌다. 수량은 적으나 천변의 무성한 풀들은 고적한 윤기를 발하고 있다. 다리 끝 버스정류장에서 '갯마을'이라는 이름을 본다. 여기까지 나룻배가 닿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마을 뒤쪽으로는 경북산림환경연구원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갓길 주차장에는 차들이 많은데 훤히 들여다보이는 연구원의 숲과 정원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 모두가 숲이 되어버린 듯하다. 아직 겨울인 메타세쿼이아 숲을 지나친다. 그들의 수직성과 기하학적인 수형은 언제나 깊은 인상을 준다.
'서출지 연못 가운데서 나타난
노인의 편지 보고 위험 감지
왕 목숨 노리던 승려·왕비 제거'
삼국유사에 내용 자세히 전해져
못 둘레 200m 타원형으로 생겨
제방엔 수령 수백년 된 소나무
서쪽 물가 정자 '이요당' 들어서
1664년 조선 현종때 임적이 건립
남산동 마을에 보물 124호 석탑
인근 양피못·산수당도 가볼만
왼쪽으로 들이 펼쳐진다. 길은 남산의 동북쪽에서 동쪽을 향해 가고 있다. 가로수는 벚나무다. 경주의 벚나무는 대부분 왕벚나무인데 이곳의 벚나무는 겹벚나무다. 겹벚나무는 왕벚나무보다 늦게 꽃핀다. 경주의 현란한 벚꽃 시즌이 끝나면 슬그머니 그러나 더없이 화려하게 피어날 것이다. 화랑교육원을 지난다. 헌강왕릉과 정강왕릉 이정표를 지난다. 그리고 곧 통일전이다. 가로수는 어느새 은행나무로 바뀌어 있고 남산이 훌쩍 다가와 섰다. 남산의 동쪽 산록을 동남산이라 한다. 그 산 아래에 나지막하고 넉넉하게 들어서 있는 마을이 남산동이다. 마을 초입에 경주역사지구라 새겨진 커다란 표지석 위로 하얀 목련이 커다랗게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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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출지 동쪽 제방에는 200년 이상 된 소나무와 수백 년 된 배롱나무 3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
남산동 입구에 아름다운 연못 서출지(書出池)가 있다. '편지가 나온 연못'이라는 뜻이다. 이 연못에 대한 전설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서기 488년 신라 21대 소지왕이 정월 보름날 행차에 나섰을 때다.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말했다. "이 까마귀 가는 곳을 살피십시오." 왕은 장수를 시켜 따라가게 했다. 동남산 양피촌 못가에 이르러 장수는 그만 까마귀를 놓쳐 버렸다. 이때 갑자기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장수에게 봉서(封書)를 주며 말했다. "이 글을 왕에게 전하시오." 왕에게 전해진 봉투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보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는다'라고 적혀 있었다. 망설이는 왕에게 신하가 말했다. "두 사람은 평민이고 한 사람은 왕을 가리키는 것이니 열어 보아야 합니다." 왕은 봉해진 편지를 열었다. 거기에는 '사금갑(射琴匣)'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거문고 갑을 쏘아라.' 왕은 왕비의 침실에 세워둔 거문고 갑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거문고 갑 속에는 왕실의 승려가 죽어있었다. 승려는 왕비와 짜고 소지왕을 해치려 한 것이었다. 왕비는 곧 사형되었으며 왕은 죽음을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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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출지 북쪽 배수로 양쪽에는 향나무 고목이 서로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다. |
이 연못은 인위적으로 꾸며진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라 한다. 한 사람이 살고 두 사람이 죽은 이후 매년 정월 첫 쥐날인 상자일(上子日)에는 모든 일을 삼가고 행동을 조심하며, 정월 보름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다. 생각해보면 쥐와 까마귀를 본지는 까마득한데, 지난 정월 보름에는 찰밥을 먹었다. 오기일도 모르고….
못의 동쪽 제방에는 수령 200년 이상 된 소나무와 수백 년 된 배롱나무 3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여인들이 배롱나무 매끈한 나목에 붙어 서 있다. 그녀들은 저마다 철수세미와 철솔을 쥐고 가지 하나하나를 열심히 닦고 있다. 진드기를 예방하는 것이라 했다. 봄날 그녀들의 수고가 있어 한여름 서출지는 백일 동안 찬란하겠다.
북쪽 배수로 양쪽에는 향나무 고목이 서로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다. 그 기울임이 너무 깊어 곧 하나가 될 것만 같다. 서쪽 물가에는 이요당(二樂堂)이라는 정자가 들어서 있다. 조선 현종 5년인 1664년에 임적(任適)이 지은 것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ㄱ자형 건물로 호안에 걸쳐 쌓은 석축 위에 올라앉아 누마루 기둥을 연못에 담그고 있다. 건물 이름은 '요산요수(樂山樂水)'에서 취했다. '산과 물을 좋아한다'는 의미다. 임적은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 덕망이 높았던 인물이라 한다. 가뭄이 심할 때면 물줄기를 찾아 이웃 마을까지 물이 부족하지 않도록 했다 전한다.
◆남산동 양피저수지
서출지 남쪽에는 남산동 마을이 높은 남산과 낮은 남산들 사이에 평안히 좌선해 있다. 너른 들이 주는 풍요의 기운과 오래된 마을이 주는 안정감이 느껴진다. 그 속에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식당, 줄 서서 기다려야 한다는 밥집, 현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는 가게가 자리하고 또 남산으로 향하는 숱한 길들이 있다.
들을 내다보는 남산경로당을 지나 조금 들어가면 석탑 2기를 만난다. 보물 제124호인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이다. 얼핏 같은 모양으로 보이지만 동탑은 모전석탑의 양식을 계승한 형태이고 서탑은 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다. 지금 탑들은 보수 중이다. 초록색 그물 보호막 너머 석탑의 모습이 어렴풋하다. 흰 바지저고리에 조끼를 입은 사람들도 보인다. 먼 과거의 풍경 같다.
석탑 맞은편에는 저수지가 있다. 양피못(壤避池)이다. 한때 양피못이 진짜 서출지라는 주장이 있었다. 지금은 현재의 서출지가 진짜라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못 가에는 임적의 아우 임극을 기리는 산수당(山水堂)이 있다. 산수당 뒤안에 자목련 꽃봉오리가 하늘을 향해 있다. 옛날 옥황상제의 딸이 북쪽의 왕을 사랑했다고 한다. 공주는 왕을 찾아 나섰고 북쪽나라에 당도했을 때 그가 이미 혼인했음을 알게 된다. 충격을 받은 공주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녀를 가엽게 여긴 왕은 자신의 아내를 죽여 함께 장사지냈다 한다. 옥황상제는 두 무덤에 꽃이 피게 했는데, 공주의 무덤에 백목련이, 왕비의 무덤에는 자목련이 피었단다. 그 뒤 두 목련은 결코 같은 자리에서 피지 않았다고 한다. 자목련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깃줄에 가슴이 붉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걱정스러울 만큼 울음소리가 쟁쟁하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경부고속도로 경주IC로 나가 직진한다. 배반네거리에서 불국사 방면으로 우회전해 가다 사천왕사지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들어간다. 경북산림환경연구원, 화랑교육원을 지나 통일전 끝에 서출지가 자리한다. 남산들 가장자리로 난 칠불암길로 약 500m 가면 삼층석탑과 양피저수지가 있다. 통일전 주차장에 주차를 한 뒤 걸어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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