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최치원의 자취를 찾아서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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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4-30   |  발행일 2021-04-30 제35면   |  수정 2021-04-30 08:54
"계림 누렇고, 송악 푸르다" 신라에 절망한 천재는 왕건에게 서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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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영정은 19곳에 봉안되어 있는데 크게 문인풍과 신선풍 영정으로 대별된다. 관모과 관복을 입고 의자에 앉은 단아한 모습, 심의(深衣·높은 선비의 웃옷)에 복건을 쓴 유학자 모습, 심산계곡에 앉아 있는 신선 모습이 있다. 문인풍 영정은 대체로 전라도 일대에 있고 영남에는 신선풍 영정이 많다. 세로 105㎝, 가로 74㎝.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66호. 경북 청도군 각남면 일곡리 학남서원 계동사(1882년 건립) 소장.

신라 대학자 최치원(857~?)은 경주 사량부 출신으로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6년 만에 과거에 급제했다. 황소의 난(881년)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을 써 문명을 떨쳤고 당 고종으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29세에 신라로 금의환향해 진성여왕에게 시무10조를 올리며 자신의 뜻을 펼치려고 했으나 난세임을 한탄하고 자연 속으로 사라졌다. 후세인들은 우리 문장의 비조(鼻祖·어떤 일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라 일컬으며 칭송했고 문묘에 첫 번째로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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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삶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사라진 합천 해인사 홍류동 계곡.

우리나라 문예의 기원
당나라 관리시절 쓴 '계원필경'
고려·조선 과거시험 모범답안돼
신라 고승 4명의 공덕 지은 비문
금석문의 기원 평가받아 '국보'
韓中정상회담때 詩 인용되기도


난세 한탄 '상소'의 시조
6두품 한계…당나라 과거 급제
'금의환향' 꿈꿨지만 답답한 현실
신라 골품제의 병폐·한계 직언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 10조'
끝내 이루지 못하고 해인사로…

◆계원필경

그의 대표적인 저술은 '계원필경'이다. 중국에서 귀국한 이듬해 당나라 관리 때 쓴 글을 정강왕에게 올린 문집이다. 회남절도사 고변의 종사관 시절에 쓴 글인 만큼 우리나라와 관계없는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사륙변려문의 화려한 문체와 수많은 전고(典故·전례와 고사), 대구와 압운이 뛰어나 중국 신당서에 언급될 만큼 우수한 작품으로 우리나라 최고 최초의 문집이다.

계원필경은 어떻게 천년 세월에 멸절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전해왔는가. 왕조 저작물은 아니지만 고려·조선 왕조는 그 가치를 인정해 나라에서 관리했다. 태종은 사고에 있는 고려왕조 서적을 춘추관으로 옮기도록 명했는데 그 속에 계원필경이 들어 있었고 단종 때 계원필경 책판 50여 개를 보완하도록 교서관에게 지시한 기록이 있다. 순조 때 전라감사 서유구가 호남포정사에서 책을 중간했고 고종은 일본 초대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에게 이 책을 선물로 주었다.

계원필경의 의미를 서문에서 밝혔는데 '모래를 헤쳐 금을 찾는 마음으로 계원(桂苑·과거급제)을 이루었고, 난리를 만나 융막에 기식하며 붓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니 붓농사 필경(筆耕)을 제목으로 삼았다'고 했다. 한자 계(桂)는 계수나무보다 과거급제 의미로 더 많이 쓰였다.

아울러 계원필경은 고려 광종 때 처음 실시한 우리나라 과거시험 과문(科文·과거문장)의 전범(典範·본보기가 되는 규범)이 됐다. 과거는 중국 제도를 본받았고 중국 과거에 급제한 그의 글에는 유려한 문체로 쓴 시부(詩賦) 책(策) 표(表) 장(狀) 계(啓)가 들어 있어 과거 답안에 원용됐다.

최치원의 변려문(4·6대구의 화려한 시문)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문사(文詞)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솜씨는 천하일품이었고 종횡무진했다. 귀족 관료의 미의식에 맞는 화려하고 숭엄한 글로 오래도록 사랑받았다. 그는 글을 사랑하는 우리 선비의 시원이었고 사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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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장쑤성 양저우시는 부산 해운대구와 공동으로 2007년 한중 문화교류사업을 진행하면서 4년간 벼슬살이했던 양저우 수서호 남문 밖 당성(唐城) 유허지에 최치원기념관과 비석을 세웠다.

◆사산비명(四山碑銘)

계원필경이 당나라에 있을 때 저술한 대표 작품이라면, '사산비명'은 귀국 후 쓴 작품 가운데 백미라 할 수 있다. 신라 고승 네 분의 생애와 공덕을 지은 비문으로 한 개는 임진왜란 때 파괴돼 세 개가 남아 있는데 모두 국보다. 먼저 구산선문 중 희양산문 개산조인 지증대사 적조탑비다. 문경 봉암사 경내에 있으며 국보 315호다. 다음은 쌍계사에 있는 국보 47호 진감선사 대공탑비로 글씨도 최치원이 직접 썼다. 그리고 구산선문 중 성주산문 개산조인 낭혜화상백월 보광탑비다. 충남 보령군 성주사 터에 있으며 국보 8호이고 글씨는 최치원의 일족인 최언위가 썼다. 마지막으로 경주 외동의 초월산 대승복사비인데 임진왜란 때 파괴돼 현재 파편과 비문만 전한다.

사산비명은 모두 왕명에 의해 찬술되었으며 우리나라 금석문의 기원을 열었다. 변려문의 전형으로 전고를 적절히 구사해 화려함과 함축미, 전아함을 모두 갖추고 있어 불교 학인들의 독본으로 널리 사용되었고 신라 말기 불교·역사·문학·정치·사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고운사와 해운대
스님들은 '사산비명' 익히고
유가·도가에서도 받들어 숭모
태수시절 조성했다는 함양 상림
경주 서악서원·문경 선유동계곡…
80여곳에 그의 자취 기록 전해져


◆고운문집

최치원의 시문을 모은 문집이 '고운문집'이다. 고려시대 이후 수차례 간행됐으나 고간본은 전해 오지 않으며 현존하는 문집은 후손 최국술이 1926년 계원필경, 동문선, 불교서적 등지에 흩어져 있는 시를 한데 모아 발간한 것이다.

고운문집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많다. 시부와 서책 등 4종 8권을 진성여왕에게 올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에 고운문집 30권이 전한다는 내용이 있고, 서거정이 만든 '동문선'에 최치원 시문이 수십 편 실려 있으며, 광해군 때 해안 스님이 고운문집에서 비문 네 편을 뽑아 책으로 엮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고운문집은 옛날부터 존재해 왔다.

지금쯤 고간본이 나올 법도 하건만 아직 소식이 없다. 사찰과 서원의 장경고, 문중 소장고, 일본과 중국의 고서점 등 어디서든지 나와 진품명품의 골든벨을 울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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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893년(진성여왕 7)에 작성하고 924년(경애왕 1)에 세워진 것으로 국보 315호다.

◆역사의 평가

신라 골품제에 한계를 느낀 최치원은 고려에 우호적이었다. 해인사에 머물며 고려 왕건에게 보낸 서한에 '경주 계림은 누런 잎이요, 개성 송악은 푸른 소나무다(鷄林黃葉 鵠嶺靑松)'하여신라가 망할 것을 예견했고 후손들은 고려 관리가 됐다. 그가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10조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후손 최승로가 계승해 고려 성종에게 올린 시무28조는 정국을 안정시키고 유교정치 실현에 기여했다. 이후 나라가 어려울 적마다 등장하는 수많은 상소(上疏)의 기원은 최치원의 시무소였다.

1020년 고려 현종은 최치원을 문묘에 배향토록 했고 문창후로 봉했다. 문묘는 신라 성덕왕 때 처음 건립돼 공자와 그의 제자 공문십철을 모셔 오다가 우리나라 인물로는 최치원을 처음 배향했고 뒤이어 설총과 안향을 모셨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지을 때 최치원전을 특별히 저술했고 정지상은 설총과 최치원을 이백과 두보로 비견해 칭송했다.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사(唐史) 열전에 최치원 전기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이라고 했다.

최치원의 숭모는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서거정은 우리나라 시문은 최치원을 개산비조로 해 내려오고 있으며 그는 우리나라 문예의 근원이라 했고, 성현은 우리나라 문장은 최치원에서 시작되었다고 했으며, 주세붕은 최문창후는 백세의 스승이라 칭했다.

우리나라 문예가 중국과 비견될 수 있는 위상을 거론할 때마다 최치원을 내세웠고, 유가와 도가에서도 숭모의 열기를 이어갔다. 스님들은 그가 찬술한 사산비명을 익혔고 도사들은 우리나라 도교의 종조로 그를 받들었다. 그는 우리나라 유·불·선의 불세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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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과 사우

삼국사기에 따르면 최치원은 가족과 함께 해인사에서 일생을 마쳤고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그의 자취에 대한 기록이 있다. 서원·사우, 석각 및 유적으로 모두 80여 곳에 있다. 서원·사우가 23곳, 석각이 40여 곳, 유적이 15여 곳이다. 지역별로 경남 28곳, 경북 22곳, 전북 11곳, 충남 11곳, 경기·광주·부산·대구에 1~2곳이 있다.

최치원의 아호는 고운과 해운이다. 고운사와 해운대는 그의 호를 직접 따 이름을 붙였고 그가 지방관으로 있었던 태산군은 전북 정읍이고 천령군은 경남 함양이다. 그 유적이 정읍의 무성서원과 함양의 상림이다. 석각은 부산 해운대와 창원 월영대·청룡대를 비롯해 산청 고운동계곡, 하동 쌍계사계곡, 합천 홍류동계곡, 문경 선유동계곡 등지에 있다.

최치원을 배향하고 있는 서원은 정읍 무성서원, 경주 서악서원, 진주 남악서원 등이다. 무성서원은 태산태수 시절 치적을 기리기 위해 고려 때 사우로 건립돼 존속하다가 숙종 때 사액을 받았고 최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무성은 정읍의 옛 이름이다. 서악서원은 경주 무열왕릉 바로 옆에 있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에도 살아남았고 2층 누각 영귀루가 명물이다.

사우(祠宇)는 경주최씨 시조인 그를 모시기 위해 문중세가 넓게 퍼지면서 많은 곳에 세워졌다. 대구에는 동구 도동의 문창후영당, 달서구 대곡동의 대곡영당이 있고 경북에는 청도 각남 학남서원, 안동 용강서원, 영덕 모운사, 울진 아산영당 등이 있다.

최치원의 영정은 19곳에 봉안돼 있는데 크게 문인풍과 신선풍 영정으로 대별된다. 관모과 관복을 입고 의자에 앉은 단아한 모습, 심의(深衣·높은 선비의 웃옷)에 복건을 쓴 유학자 모습, 심산계곡에 앉아 있는 신선 모습이 있다. 문인풍 영정은 대체로 전라도 일대에 있고 영남에는 신선풍 영정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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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따르면 최치원은 가족과 함께 해인사에서 일생을 마쳤고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그의 자취에 대한 기록이 있다. 서원·사우가 23곳, 석각이 40여곳, 유적이 15여곳이다. 최치원을 배향하고 있는 경주 서악서원은 대원군 서원 철폐에도 살아 남았으며 2층 누각 영귀루가 명물이다.

◆한·중 기념관

기념관은 우리나라와 중국에 모두 세워졌다. 경남 함양군은 그가 태수 시절 조성했다는 상림에 역사공원을 만들고 고운기념관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고, 경북 의성군은 최치원의 전설이 담긴 아름다운 사찰 누각, 가운루와 우화루가 있는 고운사 입구에 최치원문학관을 만들어 그의 일생을 영상으로 꾸몄다.

중국 장쑤성 양저우시는 부산 해운대구와 공동으로 2007년 한중 문화교류사업을 진행하면서 4년간 벼슬살이했던 양저우 수서호 남문 밖 당성(唐城) 유허지에 최치원기념관을 세웠다. 입구에는 그의 일생을 6단계로 나뉘어 조각으로 뜻을 새겼고, 시무10조를 올린 경주 상서장과 청운의 꿈을 키운 양저우의 기념관에는 모두 그의 시 범해(泛海)가 유려하게 새겨져 있다. 범해는 2013년 한중정상회담에서 인용됐다.

'돛을 달고 푸른 바다에 배 띄우니/ 바람 불어 만리 길 나아가네// 해와 달은 허공 밖에 있고/ 하늘과 땅은 태극 가운데 있네/ 봉래산이 지척이라 가까이 보이니/ 나 또한 신선을 찾아 가리라'.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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