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따라 상주 여행 .4] 병풍산 고분군과 병풍산성

  • 류혜숙 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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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5-31 07:53  |  수정 2021-06-27 14:14  |  발행일 2021-05-31 제11면
1500여년 전 지배층 무덤 862기 '고도 상주' 말없이 웅변
상주지역 최대 규모의 분묘 유적
삼국시대 석관묘·석실묘가 주류
무덤 대부분 도굴로 심하게 훼손
산 정상부 테뫼식 토석 산성 현존
견훤 아버지 아자개 웅거 전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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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산 고분군은 5~6세기경 신라시대 상주지역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2010년 체계적인 복원과 정비를 위해 지표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총 862기의 고분이 확인됐다. 현재는 일부 고분만 복원과 정비를 마쳤다.
반달처럼 둥글고 푸른 무덤들이 있다. 어느 봉분에는 대나무가 숲을 이루었다. 사람에 의해 훼손된 무덤들도 있다. 사실 대부분이 그렇다. 깎여진 봉분, 파헤쳐진 가장자리, 정신이 메마른 자가 비집고 들어갈 만한 검은 도굴갱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돌방(석실)이 드러나 있는 무덤도 있다. 벽석에 볕이 들고 개석(뚜껑돌)에는 아름드리 참나무의 뿌리줄기가 드리워져 있다. 무덤이란 어느 날 누군가 생을 다했다는 기록, 또한 사라진 한 세계. 여러 사람들과 그들의 사회가 여기에서 일어났다 스러졌다. 약 1500년 전의 일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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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산 고분군

상주시내 동남쪽에 병풍산(屛風山)이 솟아 있다. 산의 동쪽 산록은 낙동강과 맞닿아 있다. 북쪽에는 병성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한다. 천 너머는 사벌국면의 너른 들이다. 병풍산 서쪽으로는 25번 국도가 지나간다. 옛 영남대로다. 또 45번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국도와 교차하며 놓여 있다. 두 길이 만나는 지점에 상주IC가 자리한다. 봉우리는 두 개다. 정상은 해발 365.6m로 서쪽에서 상주 시가지를 내려다본다. 그보다 낮은 봉우리는 294.8m로 동쪽에서 낙동강과 강 너머 중동면의 너른 들판을 조망한다. 두 산봉우리 사이에는 북쪽으로 물을 내려 보내는 큰 골짜기가 있고 이를 에워싼 오래된 성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런 기록이 있다. '사벌국 고성은 병풍산 아래에 있다. 성 옆에 높고 둥근 구릉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사벌국의 왕릉이라 한다.'

병풍산의 북동쪽에서 북서쪽에 이르는 모든 능선에 무덤들이 무리지어 누워있다. 국도가 지나가는 서쪽의 성동고개에도 길 양쪽으로 고분이 산재해 있다. 봉분들은 침착하고 고요하게 솟아 있다. 대부분 원형의 봉토분이다.

1996년 이 고분들에 대한 일부 조사가 있었다. 본격적인 조사발굴은 1999년경 중부내륙고속도로 건설 때 이루어졌다. 당시 석관묘와 석실묘, 옹관묘, 구덩이 모양의 집터(수혈유구), 고려시대 이후의 목관묘 등이 확인되었다. 삼국시대의 토기조각과 조선 시대의 자기조각도 채집되었고, 초기 철기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와 원형점토대토기도 발견되었다. 그 중 주류를 이루는 것은 삼국시대의 석관묘와 석실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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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산 고분군의 무덤들은 대부분 도굴되었고, 어느 봉분에는 대나무가 숲을 이루었다. 파괴되고 파헤쳐진 가운데서도 봉분의 형상을 알아볼 수 있다.
이후 2010년 체계적인 복원과 정비를 위해 지표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총 862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무덤은 직경 29m, 높이 10m의 초대형에서부터 직경 7~8m의 봉분까지 다양하다. 상주에는 고분군이 많다. 그중에서도 병풍산 고분군은 상주 최대 규모의 분묘유적이다. 이들은 5~6세기경 신라시대 상주지역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병풍산에서 북서쪽으로 길게 뻗어나 간 산줄기를 '검등'이라 부른다. 검등은 '성서로운 언덕' 또는 '큰 언덕'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곳에는 직경 20m 내외, 최대 34m 규모의 봉분들이 능선을 따라 산재해 있는데 특히 대형 고분이 밀집해 있다. 무덤들은 대부분 도굴되었다. 그러나 파괴되고 파헤쳐진 가운데서도 봉분의 형상을 알아볼 수 있다.

몇몇 무덤 주변에는 호석(둘레돌)과 할석(깬돌)이 노출되어 있고 대형분에는 서너 개의 도굴갱이 뚫려 있기도 하다. 도굴갱 속으로 내부가 보인다. 편평한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벽과 치석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덮개돌, 그리고 빈 공간. 죽은 자의 방이라는 이 삭막한 명징 앞으로 현재의 삶이 펼쳐진다. 마을이 있고, 밭이 있다. 도로와 자동차가 달리고 병성천 너머 사벌들이 풍요롭다.

사벌(沙伐). 병풍산 고분군은 기록에서처럼 '사벌국의 왕릉'일까. 사벌국은 삼한시대 현재의 사벌국면에 존재했던 소국이다. 초기 철기시대는 사벌국의 여명기라 할 수 있다. 사벌국은 3세기에 신라에 복속되었지만 4세기까지 그 세력을 유지했다. 5세기 전반에도 토착 세력이 유지되는 가운데 신라의 중앙과 교류가 이루어졌다. 병풍산과 마주 보는 들 저편 둔진산에는 사벌국의 고성으로 알려져 있는 이부곡토성과 전(傳)사벌왕릉, 그리고 삼국시대의 것인 화달리 고분군이 있다.

기록은 없으나 전 사벌왕릉은 신라 경명왕의 다섯 번째 왕자인 박언창의 묘라고 전해진다. 그는 사벌주의 대군으로 책봉되었다가 후에 독립하여 국호를 '후사벌(後沙伐)'로 정하고 스스로 '후사벌왕'이라 칭했다 한다. 그리고 929년 후백제 견훤의 침공으로 패망하고 이곳에 묻혔다고 전한다. 병풍산 고분군이 사벌국의 왕릉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병풍산의 지정학적 위치와 사벌국 초기에서 삼국시대로 이어지는 유물유적으로 추정컨대 당시 사벌 땅 최고 위계의 수장 묘역임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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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이 산재해 있는 병풍산. 산의 북동쪽에서 북서쪽에 이르는 모든 능선에 무덤들이 무리지어 누워있다.
◆병풍산성

'사벌국 고성'이라 전해지는 병풍산성은 흙과 돌을 섞어 산의 정상부에 테를 두른 듯 쌓은 테뫼식 토석 산성이다. 언제 누가 축조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벌주 대군 박언창이 쌓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분명치 않고, 사벌국의 중심세력이나 삼국시대 상주지역의 지방 유지세력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상산지'에는 '병풍산에 옛성이 있는데 옛날부터 전하기를 사벌왕이 쌓았다고 한다. 성안에는 못1개소와 샘물 3곳이 있다. 동쪽 성 밖은 백질이나 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다. 예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로 성안에 물이 떨어지면 절벽 밑에 낙동강 물을 끌어다 먹었다. 그 남쪽 수리에 소금 창고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병풍산성에 웅거하며 박언창을 괴롭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918년 아자개는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고려에 귀부했다. 그때 그가 머물던 곳이 병풍산성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병풍산성은 아자개성으로도 불린다.

산성의 둘레는 약 1.864㎞다. 성벽은 상당부분 허물어지고 매몰되었지만 북문지와 남문지, 망대로 추정되는 곡성과 성벽 바깥으로 돌출된 치성, 건물지, 샘 등이 확인된다. 성벽을 따라 크고 작은 평탄부가 있고, 특히 북문지와 남문지 안에는 매우 넓은 평탄부가 계단상으로 남아 있다.

평탄부에서는 무문, 어골문, 합성문, 태선문 등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의 것들로 여겨지는 다양한 문양의 기와편이 채집되었다. 이는 성내 시설 및 건물이 있었다는 의미다. 샘은 북문지 내에 남아 있는데 풍부한 샘물이 계곡의 저지대를 습지로 만들고 있다. 성안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무수하고 개암나무, 산초나무, 찔래, 칡덩굴, 청미래덩굴도 자라나 있다. 여기저기 산벚나무가 드물게 서 있고 동쪽 봉우리에는 철쭉이 무리지어 피어난다. 습지대에는 왕버들이 자생하고 고마리가 집단 군락을 이루고 있다. 무성한 수풀 속에 옛 오솔길의 흔적이 여러 갈래 숨어있다.

산성에서는 상주시내와 넓은 들판, 굽이치는 낙동강 물길과 함께 국수봉, 속리산, 대야산, 백화산, 주흘산 등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경작지와 산계, 수계가 모두 조망되는 천혜의 요새다. 병풍산 일대의 사벌국 거점은 7~8세기경에 지금의 상주시가지 일대로 옮겨갔다고 여겨진다. '해동지도'에는 수문장처럼 상주목 읍치의 수구처를 지키는 병풍산이 묘사되어 있다. 고령의 지산동고분군 정상에 주산성이 있다. 성주의 성산동고분군 정상에는 성산산성이 있다. 병풍산고분군과 병풍산성의 관계는 앞으로의 연구과제다.

사벌국은 온통 미지다. 뚜렷한 길은 거의 없다. 분명한 것은 1500여 년 전 누군가 생을 다했고, 그들의 사회가 여기에서 일어났다 스러졌다는 것이다. 수풀을 헤쳐 옛 오솔길을 찾아낸다. 봉분의 가장자리에서 두세 걸음 물러나 고대의 시간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둥글게 부드러운 곡선으로 걷는다. 오늘의 걸음이 내일의 선명한 길이 될지도 모른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상주시 누리집. 한국지명유래집.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상주 병성동·헌신동고분군, 2001.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상주 병성동고분군, 2001. 상주박물관, 상주 병풍산고분군 지표조사 보고서, 2010. 전옥연, 병풍산고분군의 정비와 활용방안,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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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 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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