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여행] 전남 구례읍과 봉성산, 명협정·수군재건 출정공원…고을 곳곳 충무공 애국충정 발자취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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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8-27   |  발행일 2021-08-27 제13면   |  수정 2021-08-27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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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등록문화재 제120호인 구례읍사무소(왼쪽)와 최근에 복원된 명협정. 옛날 이 자리에 구례현청이 있었다. 구례읍사무소는 1936년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로 1층의 붉은색 벽돌 건물이다.

그날은 장날이었고 비가 왔다. 가까운 하늘에서 그르릉 그르릉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저절로 심장이 움찔거렸다. 지난해 마을이 물에 잠긴 뒤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서늘하고 뜨거운 이야기들이 들려왔었다. 소가 떠내려가고 마련해두었던 영정사진이 사라지고 벽과 문짝까지 잃은 이들의 이야기, 전기장판과 이불, 그리고 소고기뭇국을 나누었다는 이야기. 그로부터 한해가 지난 그날은 장맛비가 어깨를 후려치는 장날이었고, 장터는 사람들로 벅적했다. 읍내 큰길은 한산했지만, 한산함은 일상이라 했다. 일상의 당연함으로, 사는 일은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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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협정은 옛날 구례 현청의 모정으로 최근에 복원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쉬며 여러 사람을 만나 승전 전략을 고심했다고 한다.

◆구례읍

구례읍사무소 부근은 더욱 한적하다. 주변으로 요양센터, 선거관리위원회, 교육지원청, 법원 등이 자리하고 있지만 조용한 주택가라는 인상이 짙다. 옛날에는 이 일대가 구례읍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구례읍사무소는 국가등록문화재 제120호다. 1936년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로 1층의 붉은색 벽돌 건물이다. 우진각지붕에 정면 중앙의 돌출된 페디먼트를 가진 전형적인 일제강점기 관공서 건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옆에는 주민자치센터와 '구례향제줄풍류' 전수회관이 있다. '구례향제줄풍류'는 구례 지방에서 전승되는 현악영산회상, 즉 현악기가 중심이 되는 합주곡을 말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3-1호다. 전수회관에서는 공연도 하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국악교실이 운영된다.

읍사무소 주변에는 350년 된 팽나무와 600년 된 느릅나무, 500년 된 왕버들나무가 자라고 있다. 왕버들나무 앞에 최근에 복원된 명협정(蓂莢亭)이라는 누각이 서 있다. 구례읍사무소 자리에 옛날 구례 현청이 있었다고 한다. 읍사무소를 둘러싼 구례 읍내의 도로 모양과 동문식당, 북성슈퍼 등의 상호를 보면 사라진 구례읍성의 범위가 대략 짐작된다.


백의종군때 14일간 머물며 전략 고심
삼도수군통제사 복귀후 다시 방문
조선수군 재건 등 출전 채비



시간을 거슬러 1597년 정유재란 때다. 4월1일, 이순신은 왕명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의금부에 투옥됐다가 풀려나 백의종군 길에 나섰다. 구례에 도착했을 때 이순신은 현민들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북문 밖에 있었던 군자감 첨정 손인필의 집과 동문 밖 장세호의 집에 머물며 동헌에서 현감 이원춘과 체찰사 오리 이원익 대감 등 주요 인물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는 구례에서 14일 정도를 지냈다. 이곳에서 그는 '병참물자를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에 대한 승전 전략을 고심했고 남원에 있던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이동과 활동까지 감지하고 있었다. 4월26일 이순신의 백의종군 길을 줄곧 매섭게 재촉하던 금부도사 이사빈은 구례에서 갑자기 임무를 종료하고 서울로 떠났다.

그해 7월, 이순신의 뒤를 이어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이끈 조선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에 크게 패했다. 경상우수사 배설과 함께 전선 12척만 겨우 살아남았다. 위기의식을 느낀 조정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8월이었고, 이순신은 군관 9명과 병사 6명을 데리고 구례에서 조선수군 재건을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이 구례에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군자감 손인필이었는데 장군은 그를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고 전한다. 손인필과 그의 장남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구례읍 내에 후손들이 세운 '손인필 비각'이 있는데 그 일대가 '수군재건 출정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과 출정, 그리고 오리 대감과 충무공의 만남을 저 오래된 나무들은 보았을 것이다. 나무는,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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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성산에서 본 구례. 구례 읍내의 랜드마크는 거대한 지리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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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인필 비각 일대는 '수군재건 출정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봉성산

읍사무소 앞에서 골목길을 조금 오르면 구례성당이 자리한다. 예쁘다. 두꺼운 벽체와 다각형 돔의 로마네스크양식과 비잔틴의 바실리카 평면이 보인다. 구례 주민은 7할이 불교신자인데 6·25전쟁 후 전쟁 난민을 구호하면서 천주교 전교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1956년에 공소가 설립되었고 1970년에 곡성 본당에서 분리되었다. 성당 부지는 곡성 본당의 캐롤 신부가 주선하여 아일랜드 신자들의 도움으로 마련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992년에 신축된 것이라는데 아주 오래된 양식이 구례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성당 앞 예쁜 빵집 '월인정원 구례양과자점'에서 고소한 냄새가 난다. 구례읍내에는 목월빵집, 굿베리 베이커리 등 '빵지순례' 코스로 이름난 집들이 많은데, '월인정원 구례양과자점'은 내성적인 전국구 팬을 보유한 내성적인 빵집이다.


옛 현청자리에 들어선 읍사무소
국가등록문화재 제120호로 지정
봉성산공원·구례성당 등 둘러볼만
읍내엔 전국에 이름난 빵집도 많아



성당과 빵집 사이로 난 길을 1분만 오르면 봉성산(鳳城山) 공원 입구다. 봉성산은 해발 166m의 자그마한 산이지만 구례의 주산이자 진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여지승람, 대동여지도 등에도 표기되어 있다. 구례읍의 봉동리, 봉남리, 봉북리 등이 이 산을 기준으로 이름 지어졌다. 남북으로 긴 형태로 읍내 전체를 굽어보고 서시천 너머 지리산 노고단의 얼굴과 마주한다.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봉산이라고 부른다. 작은 산의 둘레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산책로 곁으로 동백과 벚나무가 분방하게 자라 여름이 깊고 무성하다. 여순사건 때 이곳에서 치열한 총격전이 있었다. 일명 '구례 봉성산 사건'이다. 1948년 11월19일 오전 5시경부터 교전이 있었고, 교전 직후 구례경찰서에 유치되어 있던 민간인들이 경찰과 군에 의해 구례경찰서 옆 공터 등지에서 사살된 후 봉성산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작은 암자와 숲속 놀이터를 보고 돌아선다. 산 절반의 절반도 오르지 않았지만 하늘이 심상치 않다. 정상에서 보는 구례읍과 노고단의 풍경이 그리 좋다던데. 산책로 초입에서도 구례읍은 제법 시원하게 열린다. 구례읍은 봉성산에서부터 서시천을 향해 미끄러지는 지형이다. 그래서 산 바로 아래 집들은 지난해 홍수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 마음이 편했을 리는 없고. 지붕들 사이로 성당의 종탑이 스윽 올라있다. 지리산은 하늘과 대치 상태다. 하늘에서 그르릉 그르릉 소리가 나지만 마을은 평온해 보였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Tip

12번 대구광주고속도로 광주방향으로 간다. 남원 분기점에서 순천완주고속도로 순천 방향으로 가다 구례화엄사IC로 나간다. 19번 도로를 따라 구례·순천방향으로 내려가다 광의사거리에서 우회전해 들어가면 구례 읍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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