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향 영양 .10] 아나키스트 엄순봉 의사…불꽃처럼 살다간 젊은 독립투사…사형 순간에도 "조선독립 만세"

  • 류혜숙 작가
  • |
  • 입력 2021-11-16   |  발행일 2021-11-16 제13면   |  수정 2021-11-16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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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군 영양읍 서부리 호국공원에 있는 '영양 3의사 비'. 영양 출신 독립운동가 엄순봉·남자현, 의병장 김도현을 기리는 비로 1977년 10월 건립됐다. 오른쪽이 엄순봉의사기적비다.

영양읍에서 영해로 가는 길목에 대천리가 있다. 읍에 속해있지만 사방 산인 골짜기에 들이 상당한 마을이다. 마을 북쪽의 산은 옥산(玉山)이라 한다. '신선이 구슬을 가지고 놀다가 하늘로 올라간 산'이다. 그 아래에 옥산마을이 있다. 옥산교 건너 마을 안을 천 따라 조금 들어가다 보면 왼쪽 길섶에 비석 하나가 낮게 서 있다. 반듯한 직사각형의 까맣고 매끄러운 비석. 어떤 설명도, 어떤 안내도 없이 거기에는 다만 이렇게 새겨져 있다. '독립투사엄순봉지사생가지(獨立鬪士嚴舜奉義士生家址)'.

가난한 어린시절 교육 못받았지만
호방한 기백 의협심 책임감 강한 소년
만주서 日폭압 목격후 독립운동 투신
김좌진장군 휘하에서 막료로 활약

상하이서 남화한인청년동맹 가입
류자명 영향받아 아나키즘에 심취
항일구국연맹 결성 무장투쟁 나서
흑색공포단 행동부원으로 맹활약

일본공사 암살시도한 육삼정의거
거사당일 日에 의해 실패로 끝나
정보넘긴 이용로 사살했지만 체포
동지와 항일투쟁하다 30대에 생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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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 영양읍 대천리 옥산마을 안을 천 따라 조금 들어가면 왼쪽 길섶에 작은 비석이 나타난다. 엄순봉의 생가지 표지석으로, 옥산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기백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었으며 책임감이 강한 소년이었다고 한다.(사진 위) 엄순봉 생가지 표지석은 반듯한 직사각형의 까맣고 매끄러운 모양으로 비석에는 '독립투사엄순봉지사생가지(獨立鬪士嚴舜奉義士生家址)'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1. 엄순봉

엄순봉은 1903년 대천리 옥산마을에서 태어났다.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달라 1905년 혹은 1906년이라는 기록도 있다. 이명은 형순(亨淳), 호는 추수(秋水)다. '가을철의 맑은 물'은 '번쩍이는 칼 빛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한다.

그의 집은 매우 가난했다. 때문에 어린 시절 교육을 제대로 받지는 못했지만 기백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었으며 책임감이 강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18세 무렵에는 영양읍 하원리 음지마을에 있던 서당에서 잠시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그러다 1922년 그는 만주로 떠났다. 홀로였는지 혹은 다른 가족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도 확실하지 않다.

엄순봉은 만주에서 일제의 강압적이고 야만적인 폭압을 목격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김좌진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청년층 막료(幕僚)의 한사람으로서 활약했다. 1929년에는 만주에 있는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의 청년부장에 선임됐다. 한족총연합회는 한국 청년층의 결집을 위해 조직된 단체였다. 이때 동지들과 함께 훈련하며 자주성을 기르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인 1930년 1월 김좌진 장군이 피살당한다. 이미 여러 선배 지도자들을 잃은 상황이었다. 이즈음 엄순봉은 재만 조선인 아나키스트연맹에 가입하면서 아나키스트로 변신하게 된다.

#2. 무장 투쟁에 뛰어들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엄순봉은 만주를 떠나 1932년 북경을 거쳐 상하이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중순 남화한인청년동맹에 가입했다. 남화한인청년동맹은 재만 조선인 아나키스트연맹이 상하이로 철수하면서 전투체제로 개편한 단체다.

엄순봉은 상하이에서 류자명의 영향을 받아 아나키즘에 깊이 있게 심취하게 된다. 1931년 11월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중국인과 일본인 무정부주의자와 연대해 '항일구국연맹'이라는 연합체를 결성하고 적극적인 무장투쟁에 나선다. 특히 항일구국연맹은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이라고 불린 행동부를 두었는데, 핵심 구성원은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맹원들이었다. 이회영, 정화암이 지휘하고, 중국인 왕아초가 재정과 무기 공급을 책임졌다. 단원으로는 백정기, 이용준, 이강훈, 엄순봉 등이었다. 엄순봉은 이들과 더불어 북경과 상하이 사이를 무수히 오가며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32년 이회영이 일제에 의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곧이어 1933년 3월 일본 육군대신 아라키를 중심으로 한 일본 군벌은 주중공사 아리요시에게 4천만 엔(미화 2천만 달러 상당)을 주고 중국 국민당 내의 친일분자 및 패잔군벌 등을 매수할 음모를 꾸민다. 중국인 사이의 내분을 조장해 반만항일(反滿抗日)운동의 기세를 약화시키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한인 독립운동가 탄압에 중국이 협력하게 할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아리요시는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기생하면서 일본에 부역하고 있는 인사들과 일본군사령부의 고급 장성들이 자리를 같이하는 연회를 기획한다. 1933년 3월17일 상하이 공동조계에 있는 '육삼정'이라는 고급 요정에서였다. 정보를 미리 입수한 흑색공포단은 연회를 습격해 아리요시 등을 폭살하기로 계획한다.

거사에는 류자명, 원심창, 백정기, 이강훈, 이용준, 정화암, 오면직, 정현섭, 김성수, 이달, 정해리, 김지강, 박기성, 이규창, 엄순봉 등이 참여했다. 실행에는 백정기, 원심창, 이강훈이 선출되었고 엄순봉은 후보자로 결정됐다.

이들은 윤봉길 의사 의거 후 김구 주석이 상하이를 떠나 가흥으로 이동할 때 맡긴 폭탄 2개와 중국인 왕아초 등으로부터 조달된 권총 2자루와 탄환 20발, 그리고 수류탄 1개도 준비했다. 거사 일이 다가오면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던 중 거사 당일 갑자기 덮친 일본군에 의해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사건이 바로 '육삼정 의거'였다. 육삼정 의거는 실패한 거사였지만 '장제스 주석과의 밀약'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중국은 물론 침체기의 국내 항일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특히 육삼정 의거는 윤봉길의사 의거, 이봉창 의사 의거와 함께 한국독립운동사의 해외 3대 의거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3. 아나키스트 만세, 조선독립 만세

육삼정 의거 이후인 1934년 엄순봉은 이회영의 아들인 이규호와 함께 조선거류민회의 이용로를 제거하기로 모의한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이용로가 반동분자를 규합해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정보를 수집해 일제 경찰에 제보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마침내 1935년 3월 25일, 엄순봉은 이규호의 안내로 이용로의 집을 찾아가 사살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두 사람은 붙잡히고 말았다.

당시 주요 신문들은 '1935년 3월 25일 한인거류민회 고문 이용로를 암살한 30살 엄순봉과 21살 이규호를 조사한 일본영사경찰은 이들이 한국무정부주의당의 단원임을 밝혀내었다. 이들은 또한 1933년 3월의 아리요시의 암살기도, 1933년 8월의 옥관빈 암살, 1933년 12월의 프랑스 경찰의 고용원인 옥성빈의 암살에도 관계가 있다'고 전했다.

재판에 넘겨진 엄순봉은 결국 1936년 4월 24일 사형을 언도 받았다. 그는 구차하게 상고하지 않았다. 2년간 복역하다가 1938년 4월9일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입회한 법무관이 유언을 물었다. 엄순봉은 죽음 앞에서도 단호했다.

"설령 전할 말이 있다 하더라도 적인 너희들을 통해 유언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도 사람이요 너희들도 사람이니 공통된 인류애로서 너희들에게 일언(一言)한다. 내가 과거에 행한 바는 압박을 받고 허덕이는 민족을 구하기 위한 것이니, 원컨대 그대들은 가식된 논변과 법리론을 청산하고 참으로 인류를 정복·피정복이 없고 압박과 착취와 악행이 없는 진정한 평화의 세계를 만들어 인류 만대의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하라."

당시 사형을 집행한 형리의 말에 따르면 엄순봉은 형장으로 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조금도 당황하거나 초조해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 순간 '조선독립 만세', '아나키스트 만세'를 삼창하고 운명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이 독립을 이루고 엄순봉은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영양읍내 군민회관 앞에는 영양 호국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 영양의 독립투사인 엄순봉·남자현, 의병장 김도현을 기리는 '영양 3의사 비'가 나란히 서 있다. '엄순봉의사기적비'에는 그의 짧지만 불꽃 같았던 생이 새겨져 있다. 비석에 새겨져 있는 그의 호는 추수(秋水)가 아닌 '추수(秋樹)'다. '가을 나무들처럼 자기 분신인 낙엽으로 세상의 거름이 된다는 뜻'이라 한다. 그는 번쩍이는 칼을 품고 살다 거름이 되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디지털영양군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민족문제연구소 누리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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