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향 영양 .11] 시인 오일도…일제강점기 詩 전문지 '시원' 창간…조선 문단에 예술문화 꽃 피워

  • 류혜숙 작가
  • |
  • 입력 2021-11-23   |  발행일 2021-11-23 제13면   |  수정 2021-11-23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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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도 시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책을 펼쳐 들고 앉아 있는 시인을 만날 수 있다. 그 옆에는 '지하실의 달' 시비가 있다. 오일도는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며 억센 항변과 암울한 시대를 한탄하는 시들을 썼다.

다섯 칸 솟을대문이 아담하다. 대문 옆 담벼락에는 작은 화단이 가꾸어져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중문간을 사이에 두고 좌측에 1칸 규모의 작은 방이 있고 우측에는 팔작지붕에 마루가 있는 사랑채가 자리한다. 중문 너머 안채까지 모두 44칸의 한옥이지만 담박하다는 느낌이 크다. 1901년 이곳에서 시인 오일도(吳一島·1901~1946)가 태어났다. 그는 사랑채의 온돌방에서 생활했고 한 칸 작은 방이 그의 글방이었다고 한다. 150년이 넘은 집이지만 마루가 반들거린다.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어 집안 어디에나 생기로운 자취가 가득하다.

1925년 '한가람 백사장에서'로 등단
문예동인지 시문학 등에 서정시 발표
한시들, 암울한 시대 민족 슬픔 다뤄
맏형에 자금 얻어 창간한 전문지 '시원'
강점기 조선시인 작품 발표 장 역할

수많은 시인·작품 세상에 알렸지만
정작 생전에 시집 한 권도 출판 안해
유고詩 '현대시학' 통해 세상에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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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도 시공원에는 '내 연인이여! 가까이 오렴!' '누른 포도잎' '그믐밤' '코스모스' '가을하늘' 등 그의 시를 새겨 넣은 바윗돌들이 나지막한 둔덕 가운데 서 있다.

#1. 감천마을과 오일도, 그리고 시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이 영양읍의 남쪽에서 초승달처럼 굽이지는 곳에 감천(甘川)마을이 자리한다. 큰 내가 마을 앞을 흐른다고, 혹은 마을 뒤 산기슭에 단맛이 나는 좋은 물이 샘솟는다고, 또는 마을에 감나무가 많다고 감천이라 했다 한다.

마을은 낙안오씨(樂安吳氏) 집성촌이다. 400여 년 전 통정대부를 지낸 오시준(吳時俊)이 처음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천변에서 조금씩 물러난 구릉진 땅의 형세대로 집들이 들어서 있다. 기와를 얹은 흙돌담 길이 넉넉하게 휘어지며 부드럽게 울렁인다. 오일도의 생가는 이 마을의 한가운데 자리한다. 그의 조부 오시동(吳時東)이 1864년에 지은 집이다.

오일도의 본명은 희병(熙秉), 일도는 아호다. 입향조 오시준의 10세손으로 아버지는 오익휴(吳益休), 어머니는 의흥박씨(義興朴氏)다. 아버지 오익휴는 천석의 거부로 오일도는 넉넉한 가풍 속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는 8세부터 14세까지 마을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1915년 뒤늦게 영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이른 1918년에 졸업했다. 그리고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합격했지만 졸업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글방은 너무나 고요해서 차마 열어보지 못했다. 어쩐지 그의 고요한 침잠을 흩트릴 것만 같아서. '작은 방 안에/ 장미를 피우려다 장미는 못 피우고/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저녁놀 中)

오일도는 1922년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그리고 이듬해 릿쿄대학(立敎大學) 철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학업 중인 1925년 '조선문단(朝鮮文壇)' 4호에 시 '한가람 백사장에서'로 등단했다.

'한가람 백사장은/ 흰 갈매기 놀던 곳/ 흰 갈매기 어디가고 갈가마귀 놀단 말가./ 교하(橋下)에 푸른 물은/ 의구(依舊)히 흐르건만/ 이처럼 변하였노.'

한민족의 한(恨)이 서린 영탄이다. 그는 1929년 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해 1년 동안 덕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근화학교(槿花學校)에서 무보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1931년 문예동인지 '시문학'과 종합문예지인 '문예월간' 등에 서정시를 발표했다.

이후 오일도는 1935년 2월에 맏형 희태(熙台)로부터 자금을 얻어 시 전문지 '시원(詩苑)'을 창간했다. '시원'은 1935년 12월에 5호를 내고 발행이 중단되었지만 조선 문단 시인들의 작품 발표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특히 우리 현대시의 발전 속도를 한층 빠르게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일도는 시원 창간호 편집후기에 이렇게 썼다.

"문학은 그 시대의 반영이라면, 문학의 골수(骨髓)인 시는 그 시대의 대표적 울음일 것이다. 그러면 현재 조선의 시인이 무엇을 노래하는가? 이것을 우리는 우리 여러 독자에게 그대로 전하여 주고자 한다. 여기 본지 '시원' 출생의 의의가 있다."

시원의 발행 중단은 오일도의 심신에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1936년 '을해명시선집(乙亥明詩選集)'을 발행하고, 1938년에는 조동진의 유고 시집인 '세림시집'을 발간하는 등 시대의 울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들 시집은 지금도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료들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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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오일도 생가의 사랑채. 1901년 영양에서 태어난 그는 사랑채의 온돌방에서 생활했고 한 칸 작은 방은 그의 글방이었다고 한다.

#2. 오일도 시문학공원과 시를 통한 저항

마을 안쪽에는 감천지라는 연못이 있다. 동쪽 제방을 따라 멋진 노송들이 굼실굼실 가지를 뻗고 있다. 연못 뒤쪽에 오일도 시문학공원이 조성돼 있다. 나지막한 둔덕들이 올망졸망 펼쳐진 가운데 오솔길이 흐르고 굽이지는 길섶마다 그의 시를 새긴 비가 기다리며 서 있다.

'내 연인이여! 가까이 오렴/ 지금은 애수의 가을, 가을도 이미 깊었나니.'(내 연인이여! 가까이오렴)

'밤새껏 저 바람 하늘에 높으니/ 뒷산에 우수수 감나무 잎 하나도 안 남았겠다.'(노변애가)

오솔길을 한 바퀴 돌아 나와 '지하실의 달' 시비 옆에 책을 펼치고 앉은 그를 본다. 오일도의 작품은 한시의 현실주의 세계관과 한글시의 서정성이 조화를 이룬다. 식민지 현실을 다룬 한글시에서의 서정성은 매우 우울하고 비감에 가득한 우수 어린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한낮에도 광명을 등진/ 반역의 슬픈 유족, 오오 올빼미여!/ 자유는/ 이 땅에서 빼앗긴 지 오래였나니/ 혈전의 네 날카로운 주둥아리/ 차디찬 역사를 씹으며 이대로 감인할 건가.'(올빼미)

이와는 달리 그의 한시 세계는 일제의 공출이나 징용 등과 같은 내용이 주제를 이루며 현실을 보고 슬픔과 분노를 느끼는 일에 적극적이다.

'나의 집은 한길 가 아침저녁으로 수레가 잇닫는다.(吾家大路邊 朝暮車連綿) 보내고 또 보내는 눈물 어이 끝나리. 언제 돌아오나 물으면 대답은 아득할 뿐.(送送淚何盡 歸期問杳然)'

'징용차를 보내며(送徵用車)'라는 시다. 그의 한시에는 진실로 하고 싶은 말들이 처절하게 담겨 있다. 나태주 시인은 그의 시에 대해 '억센 항변과 암울한 시대를 한탄하는 시들'이라 했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일제의 통제가 더욱 강화되자 오일도는 1942년 낙향했다. 그리고 그는 '과정기(瓜亭記)' 등 수필을 쓰면서 긴 칩거에 들었다. 광복이 되자 상경해 문학 활동을 재개하는 한편 민족민주 진영인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에 입당해 자주독립국가와 민주주의 수립에 뜻을 두었다.

특히 그는 '시원'의 복간을 위해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문에 깊은 우울에 빠져 폭음으로 나날을 보냈다. 결국 그는 1946년 간경화증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2월28일 맏아들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감천마을의 언덕에서 자신의 시들에 둘러싸여 책을 펼친 그는 여전히 젊다. 한 문학평론가는 1938년 '사해공론(四海公論)'의 '문단인물지(誌)'에 오일도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일도 오군은 너무 선인(善人)이고 너무 고독한 친구이기 때문에, 즉 그의 인생에서 나의 인생을 발견하기 때문에 나는 고통 없이 군을 대하지 못한다. (중략) 이 친구는 눈물이 너무 많아서 시를 못 쓴다. 미제라블한 오일도.'

그는 수많은 시인과 작품을 세상에 알렸지만 정작 자신의 시집은 생전 한 권도 출판하지 못했다. 그의 유고 시들은 1973년이 되어서야 '현대시학'을 통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3년 뒤인 1976년에는 유고 시집인 '저녁놀'이 근역서재에서 발간되었다. 이들 유고는 오일도 시인이 생전에 조지훈 선생에게 맡겨 두었던 것이라 한다. 오일도의 유고는 조지훈이 사망한 후 그의 고모인 시조 시인 조애영 선생이 묶었다. 이후에 '지하실의 달'이 문화공론사에서 출간되었고 1988년에는 영양 출신 시인인 이병각·조지훈·조동진·오일도 네 사람의 시를 묶어 낸 '영양 시선집'이 발행됐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디지털영양군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잡지백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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