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혜의 클래식 오딧세이] 모리스 라벨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치간느' Op.76

  • 김지혜 바이올리니스트·다원예술그룹 ONENESS 대표
  • |
  • 입력 2021-11-26   |  발행일 2021-11-26 제37면   |  수정 2021-11-26 09:08
도입부에 카덴차…자유로운 곡 구성에 압도당해

2021112101000633200025162
모리스 라벨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치간느'는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1922년부터 구상을 시작해 1924년 완성한 곡으로 치간느(Tzigane)는 프랑스어로 집시를 의미한다. 이 곡에 대한 구상은 라벨이 런던에서 만난 헝가리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젤리 다라니의 연주에서 출발한다. 라벨은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소나타를 1922년에 작곡했고 이 곡의 연주를 보기 위해 런던으로 여행했다. 연주회가 끝난 후 라벨은 헝가리 출신의 음악가였던 젤리 다라니에게 집시 음악을 연주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녀의 연주에 매료되어 '치간느'를 작곡하게 된 것이다.

19세기부터 유럽인들에게 집시 음악은 곧 헝가리 음악을 의미했다. 집시 음악의 기원이나 전형적인 특성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헝가리와 동유럽에 정착했던 집시들이 바이올린과 노래로 그들의 정서를 많이 표현했다. 그들의 애환과 열정을 잘 담아내는 현악기 특유의 특질이 만나면서 높은 인기를 얻었고 곧 클래식 음악에서 '헝가리풍'은 집시 음악의 모방으로 인식되었다. 라벨 역시 집시 음악이 곧 헝가리 음악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헝가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집시 음악을 연주해 줄 것을 요청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집시 음악은 그들의 유랑생활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됐다. 집시들은 인도의 신분 계급제인 카스트와 이슬람 군사들의 잦은 침략 등의 이유로 5~6세기경 인도 북부의 펀자브(Punjab) 지역에서 출발해 소아시아, 동유럽, 서유럽으로 이동하며 유랑생활을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음악과 정착지 고유의 민속 음악의 특징을 섞어 연주하였고 대부분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연주하는 방식으로 생계를 해결했다. 스페인에서는 주로 기타 음악, 동유럽에서는 현악기와 성악곡을 편곡해 연주했고 이것은 그 지역의 사람들과 함께 공존하기 위한 집시들의 피나는 노력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 나라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대부분이 사회의 최하 빈민층으로 살며 많은 수모와 박해를 당했다. 그리고 그 고통은 현재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

집시들의 애환이 담긴 음악은 유럽 사회의 문화, 특히 클래식 음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469년 이탈리아의 페라라 공작의 궁정, 1489년 헝가리 궁정에서 집시들이 연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집시들의 연주는 클래식 음악을 즐기던 유럽의 상류층에게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갔으며 동시에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하이든, 브람스, 드보르자크, 리스트 등의 작곡가들은 집시 선율과 음계를 사용해 작품을 남겼고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은 그 대표적인 명곡들이다.

14~15세기경 헝가리에 정착하기 시작한 집시들은 헝가리 민속 음악과 접목한 다양한 음악을 만들었고 이것은 새로운 양식의 춤곡인 '베르분코슈(Verbunkos)'로 불리게 된다. 이 춤곡은 헝가리 각 지역에서 연주되었고 군대의 신병모집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군대에서는 집시들을 고용해 헝가리 곳곳을 순회하며 연주하게 했고 이 춤곡은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대중에게 인기있는 장르는 많은 작곡가에게 매력적인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베르분코슈가 연주되었고 그렇게 발전하게 된 것이 헝가리를 대표하는 무곡, 차르다시(Czardas)다.

라벨의 '치간느'는 차르다시와 유사한 구성을 갖고 있다. 차르다시는 애환과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느린 템포인 라슈(Lassu)로 시작해서 열정적인 헝가리인들의 기질을 닮은 듯한 빠른 템포의 프리스(Friss)로 연결되는데 라벨이 작곡한 '치간느'도 같은 형식이다. 라벨의 곡이 조금 다른 면은 도입부가 바이올린의 카덴차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카덴차는 고전 음악에서 솔리스트의 화려한 기교를 보여주기 위해 주선율을 변형하며 다양한 연주 테크닉을 이용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곡의 말미에 등장한다. 라벨은 이 카덴차를 작품의 도입부에 넣어 바이올리니스트 혼자서 약 4분간(연주자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다) 연주하도록 했다. 이것은 마치 연극 무대에서 한 명의 배우가 독백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흡사하다. 이 시간 동안 관중은 화려한 기교와 함께 배우의 독백과 같은 연주자만의 개성과 정서를 경험하고 아울러 이 곡의 이국적인 매력에 압도된다. 곧이어 하프 연주로 시작하는 오케스트라가 등장해 이어가는 빠른 템포의 격렬한 춤곡은 라슈 부분에서 표현된 애통함을 정화하는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준다.

2021112101000633200025161
김지혜 (바이올리니스트·다원예술그룹 ONENESS 대표)

라벨의 탈유럽적 관심은 성장배경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자신의 국적은 프랑스이지만 스위스인 아버지와 스페인 바스크 지방 출신의 어머니의 영향으로 비슷한 듯 서로 다른 문화적 정서를 어릴 때부터 축적해왔다. 14세의 라벨은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인도네시아 자바·발리 지방의 가믈란 음악, 러시아, 아시아, 집시 음악 등을 접하게 되었고 이국적인 소리에 매료되었다. 그는 하바네라·파반느·볼레로와 같은 스페인 민속 무곡, 미국 재즈의 영향으로 블루스 리듬과 음계를 사용하였고 과거의 푸가, 대위법, 교회선법 등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다양한 음악 어법을 구사하는 작곡가였다. 드뷔시와 함께 인상주의 음악으로 출발했지만 그것과는 다른 새로운 음악적 요소를 찾기 위해 인상주의와 결별했고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을 음악 속에 담았다.

바이올리니스트·다원예술그룹 ONENESS 대표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