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성의 직업 (하)] 화장품 파는 매분구, 남의 재물 받아 조정 관리에 청탁하다 처벌 받기도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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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2-24   |  발행일 2021-12-24 제36면   |  수정 2021-12-24 08:46
제주 어촌 여성들 10세 되면 잠수 익혀 미역 따고 전복 캐는 것 업으로 삼아
개성 사람 김사묵, 선죽교 옆에 채소밭 일구고 채소 판 돈으로 쌀·고기 사서 온 식구 먹여 살려
연회 자주 즐겼던 연산군은 보염서 두어 왕실에 필요한 의복·화장품 공급 전담하게 해
화장하는 모습.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화장품판매원 '매분구'

조선시대 화장품은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왕실뿐 아니라 민간 사대부 여성까지도 화장에 관심이 대단했다. 1506년 9월2일자에 쓰인 '중종실록'에 따르면 기생들을 왕실로 불러들여 연회를 자주 즐겼던 연산군은 보염서를 두어 왕실에서 필요한 의복과 화장품 공급을 전담케 했다. 정조 때 지어진 '홍재전서'에는 풍속이 사치해지면서 생긴 병폐 중 하나로 예단과 화장품을 갖추지 못해 때를 놓쳐 혼인하지 못하는 일을 거론했다. 안정복이 지은 '여용국전'은 여자의 얼굴(국가)에 각종 이물질(적군)이 침입하자 화장 도구와 화장품(군사)으로 물리치는 내용이다. 빙허각이씨는 '규합총서'에서 '장대록'이라는 제목으로 조선 여성의 미용 실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했는데 머리 모양, 눈썹 화장, 얼굴 화장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다. 따라서 조선시대 때 화장품의 수요가 적지 않았으며 활발하게 유통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화장품 판매업자를 '매분구'라고 불렀다. 이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 고려말 이색의 '매분자'라는 시는 중국에서 수입한 화장품의 판매업자 앞에서 늙고 병들어 화장을 할 수 없게 된 아내를 언급했다. 1488년 '성종실록'에는 매분구이자 로비스트인 망오지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화장품 판매업자로 일하면서 남의 재물을 받아 조정의 관리들에게 뇌물로 청탁하다가 발각돼 처벌을 받았다.

조귀명은 '동계집'에서 한 남성에 대한 정절을 지킨 여인의 이야기를 남겼다. 아름다운 여인과 이웃집 남자의 애틋한 사랑, 실패, 상사병, 죽음, 정절이 어우러진 짤막한 러브 스토리다.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이 생계를 위해 선택한 직업이 바로 매분구다. 그녀가 판매한 화장품은 주로 연분(흰가루로 된 화장품)이었다. 이 이야기를 글로 남길때 그녀의 나이가 일흔쯤이었으니 17세기부터 활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행이 지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한승부'에 따르면 서울에는 영희전(지금의 서울 중부경찰서 앞) 동쪽 안팎에 두개씩 총 네 개의 화장품 판매점이 운영됐다. 여성용품이어서 판매 담당자는 모두 여성이며 상설 매장을 운영하는 동시에 방문 판매도 이뤄지고 있었다. 따라서 매분구는 매장 직원과 외판원으로 구분됐거나 동일인이 두 역할을 번갈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1901년 만전회춘당과 국영당약국은 황성신문에 백분과 함께 사용해 얼굴의 잡티를 제거하는 연녹향이라는 수입 화장품 광고를 모두 14차례 실었다. 이처럼 19세기말을 전후해서 화장품 판매업은 약방의 형태로 상설 매장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1015년부터 생산된 박가분이라는 화장품이 1918년 특허국에 정식 상표로 등록되면서 화장품 생산은 기업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잠녀 바닷속을 누비다

제주도의 문화를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해녀다. 지금은 산소를 공급하는 보조 장치없이 바닷속으로 들어가 해조류와 패류를 채집하는 여성을 해녀라고 한다. 그런데 '숙종실록'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해녀는 어촌에 살면서 어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일컫는 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해녀를 잠수하는 여자, 잠녀라고 불렀다. 제주의 어촌 여성들은 육지 여성들이 하는 누에치기와 솜타는 일을 하지 않았다. 양태를 들고 망사리를 맺어 미역 따고 전복 캐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겨우 열살이 되면 잠수 기술을 익히는데 그때부터 바닷속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기술이 족쇄가 되어 삶을 억압했다.

바닷속에 들어가 수영과 잠수를 하며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을 '포작'이라고 했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따르면 포작에 종사하는 남성은 적었고 여성은 많았다. 따라서 원래는 잠업에 종사하는 남성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02년 '숙종실록'에는 바닷가에 배를 소유하고 고기잡이에 직접 종사하는 격군의 아내를 잠녀라하고 격군은 아내에 비해 두 배 정도 되는 포작을 관아에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남사일록' 1680년 기록에 제주에는 남자의 무덤이 매우 적으며 여성은 남성에 비해 세 배 정도 많다는 증언이 있다. 딸을 낳으면 부모에게 효도할 아이를 낳았다고 하고 아들을 낳으면 고래와 자라의 먹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있다. 관아의 무리한 요구에 못이긴 격군과 잠녀들이 도망갔다는 기록이 많은 것을 보면 당초 남녀 모두 잠업에 종사했지만 남성들이 죽거나 도망하면서 남아있는 여성들이 이를 모두 떠맡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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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소장〉
잠녀가 바다에서 채취하는 상품은 전복을 비롯해 어패류와 미역 따위의 해초류, 오징어 등이다. 어촌에 사는 사람의 경우 남편은 1년 내내 진상할 전복과 미역 등을 마련하여 관가에 바쳐야 했다. 이형상이 1702년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서는 목동보다 열배는 어렵다고 했으니 노동 강도와 수탈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어촌에 살던 사람들은 죽기를 무릅쓰고 도망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들은 과도한 수탈에 따른 참혹한 실상을 알리고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개선되지 않았다.

그 결과 포작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감소했다. 이익태의 '지영록'에 따르면 1695년까지 전복잡이 잠녀는 9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미역을 캐는 잠녀는약 800명이 있었다. 일이 너무 힘들어 도망가 버리거나 나이가 들어 전복잡이 잠녀의 수가 점점 감소하자 관리들은 조정에 진상할 상품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 대안으로 미역 잠녀들에게 전복 채취 기술을 익히게 해서 한두 개씩 할당하는 식으로 전복잡이 잠녀의 수를 유지했다.

우측 상단부터 가지, 오이, 죽순, 석류, 조개가 보인다. 강세황 '채소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여성 경영인의 채소전

조선시대에 아무리 먹을 것이 귀했다지만 채소 정도는 실컷 먹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 농부들은 채소를 심지 않았다. 채소를 심을 땅도 없고 재배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다. 벼농사와 채소농사는 병행하기 어렵다. 채소심을 땅이 있으면 곡식을 심는 게 낫다.

전국의 큰 고을 주변에는 늘 채소밭이 있었다. 개성 사람 김사묵은 선죽교 옆 채소밭을 일구었다. 먹고 남은 것을 내다팔았는데 채소가 귀해서 잘 팔렸다. 이렇게 번 돈으로 쌀과 고기를 사서 온 식구가 먹고살았다고 하니 제법 수지맞는 장사였던 모양이다.

채솟값은 결코 싸지 않았다. 조선 후기 국가 조달 물자의 가격을 기록한 '물료가치성책'에서 50여 종의 채솟값을 확인할 수 있다. 배추 한 단 가격이 쌀 두 말, 파 한 단이 쌀 한 되, 상추 한 단이 쌀 다섯 홉이다. 지금처럼 크고 좋은 것도 아니었을텐 데도 이 정도면 귀한 음식이라고 하겠다. 채소 종자도 귀했다. 최덕중의 '연행록일기' 중 1592년 12월22일자 기록을 보면 "궁중에 채소를 납품하는 내농포의 채소 종자는 중국가는 사신들이 진자점(지금이 허베이성 탕산시)에서 구입해 온 것이었다"라고 적시돼 있다.

조선 초기에 이미 온실을 설치해 겨울에도 채소를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채소가 귀하다 보니 염장이나 건조 기술도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유수원은 자신의 저서 '우서'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보관하는 채소는 무김치가 고작이다. 산나물은 산골 사람 외에는 보관하는 사람이 거이 없다. 조선에도 중국처럼 전업으로 채소를 말려서 파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선태기자 youst@yeongnam.com

출처=조선잡사(강문종 등 공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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